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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 논쟁] ([陽明學 論爭])

16~18세기에 조선 성리학계에서 전개된 양명학에 대한 찬 반 논쟁. 16세기 초 명(明)에서 왕양명(王陽明)이 주자학(朱子學)을 비판하고 '심즉리(心卽理)''지행합일(知行合一)' 등을 주장하는 심학(心學). 즉 '양명학'을 일으켜 번창시켰다. 이러한 양명학이 조선에 유입되었을 때(그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에 대하여 격심한 논쟁이 일어났다. 주자학 일변도로 정착되어 있던 당시의 유학계에서는 양명학 배척론이 우세하여 그 유입을 금하고, 양명학을 수용하고자 노력했던 학자들을 이단(異端)또는 사문난적(斯文亂的)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이것은 박세당(朴世堂)이 주자학을 비판하자 이를 사문난적이라 하여 유배시킨 사건과 흡사하다. 양명학 반대론자의 대표자는 이황(李滉)으로서, 그는『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양명의『전습록』이론을 성리학에 의하여 비판하였다. 그를 따르던 학자들과 후대의 성리학자들이 참여하여 양명학 배척의 분위기가 고조 되었다. 유성룡(柳成龍)은 왕양명이 주자학을 비판한 것을 다시 조목별로 반박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조선 유학계를 더욱 성리학 일변도로 만들어 고답적이고 고지식한 경향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양명학 찬성론자들은 주자학 일변도를 비판하고 조선 유학의 활성화를 위하여 양명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양명학을 연구한 학자로는 남언경(南彦經), 이요(李謠),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이며,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는 조선 양명학 연구의 최고봉이다. 후일 실학자 이익(李瀷)은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 경향의 공리공론을 비판하였으며, 구한 말 박은식(朴殷植)은 유교를 대중화하고 민중의 유교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양명학이 필수적이라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정인보(鄭寅普)는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저술하여 미지의 영역이었던 한국 양명학의 연원을 찾는 데 중대한 시금석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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