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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war)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4반세기가 지난 후인 1815~54년까지 장기간 계속된 유럽의 평화시대에 성장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전쟁은 인류 활동의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데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더욱이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 즉 프러시아 제정의 지배 하에서 진보적인 중류 계급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1840년대에 역사에 대한 접근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경제적 생산을 기초로 한 접근방식이었으며 이제까지의 역사가가 전쟁과 폭력을 주제로 삼아온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가치를 감소시킨 것이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은 분쟁의 빈번함을 인정했으나 로마제국을 통치했던 야만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복자는 그들이 설립한 생산체계에 적응해야만 하며, 그것과 함께 피정복자의 언어나 종교를 수용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전쟁의 의미를 축소시켰다.(1부 2절)
그러나 1848년, 그들과 공산주의 동맹의 동지들은 반(反)러시아 ‘혁명전쟁’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다. 그것은 유럽을 가로질러 행군하는 프랑스 혁명군의 전례에 기초한 전략이었다-이것은 마치 유럽 전체를 혁명화하는 것만큼이나 전차 유럽을 소름끼치게 하였다.(그들은 이렇게 회상했을 것이다.) 이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쟁에 관한 문제는 이 두 사람의 관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차이가 있었지만 상보적 관심사를 발전시켰다. 즉 마르크스는 보다 이론적인 문제에, 엥겔스는 전쟁의 방법과 기술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엥겔스는 프러시아 포병대에서 단기간 의무 복무를 했으며, 1849년 남서독일에서의 실패로 끝난 봉기에 참가하였다. 1851년의 편지(바이데마이어에게, 6월 19일)는 활활 타오르는 다음 번의 폭동을 자신이 지도할 수 있다는 매우 실천적 동기를 갖고서, 상당히 포괄적인 군사학 연구를 계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마르크스가 경영하던 시사문제 논평잡지에 군사적 문제에 관한 많은 글을 기고했다. 이러한 논문들로 인해서 그는 전문가로서의 평판을 받았다.
현대의 경제와 전쟁의 관계에 대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결코 하나의 규칙적 유형으로 묶어버릴 수 없는 다양한 견해를 표명했다. 《독일이데올로기》(1부 2절)와 기타 저작에서 그들은 대략 1800년까지 이르는 초기 자본주의는 상업자본이 주도적이었으며, 무역경쟁을 첨예화하는 식민지 쟁탈과 더불어 많은 전쟁에 의해 특징지워져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나 새로운 산업자본주의는 다른 조명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던 것 같다. 그들이 《신성가족》(6장 3절)에서 활로를 발견한 초기의 통찰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은 것은 유감스런 일임에 틀림없었다. 이에 따르면 그 자신을 위한 명예와 전투에 사로잡혔던 나폴레옹은 부르조아를 위한 시장 개방으로 프랑스 부르조아를 육성한 것이 아니라, 그 즈음의 마르크스주의가 취하기 쉬었던 경향과도 같이 오히려 그들을 산업건설의 정도에서 이탈시키고 있었다. 1849년 마르크스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이러한 평온한 개념을 금융 과두제에까지 확장했다. 즉 분쟁은 증권시장을 침체시키기 때문에 금융 과두제는 평화를 요구하는 것이다.(《계급투쟁》1절) 1853년 6월의 논문에서 그는 경제적 위기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전쟁을 야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제적 위기는 표면적으로-엄격히 말해서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전쟁을 유발시킨다.(‘중국과 유럽에서의 혁명’)
그 당시 유럽은 분쟁 초기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으며, 마르크스가 정열적인 흥미를 가졌던 1854~56년의 크리미아 전쟁이 임박해 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동양시장에 대한 이해와 마찬가지로 동맹국 측의 일련의 경제적 동기는 정치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즉 나폴레옹 Ⅲ세는 부당한 수단으로 얻은 왕관을 빛내줄 명예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팔머스톤은 의회 개혁에 대한 요구를 회피하려 하고 있었다. 전쟁은 정부에 의해 그 나라 국민에게 가해지는 재난이라고 비난한 것은 (《동양 문제》108호) 한편으로 마르크스 사상의 자연스런 경향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와 엥겔스는, 그 후의 레닌과 같이 평화주의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리고 당시 그들의 지배적인 생각은 ‘유럽의 경찰’로서 1848~49년의 혁명의 확실한 패배를 초래한 짜르의 간섭에 대한 것이었다. 니콜라스 1세[Nicholas Ⅰ]에 대항한 전쟁의 승리는 러시아를 해방시키고 유럽에서 진보의 길을 재개할 것이었다. 더구나 정부의 인습적인 격론이 인민과 원칙의 진실한 혁명전쟁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능하고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약하고 미온적인 논쟁에 혐오감을 느꼈다. 엥겔스는 지도자의 무능력과 ‘전쟁 기술’의 부패를 한탄했으며, 마르크스는 마치 그가 한동안 계속되는 산업번영 하에서 문명은 본격적인 싸움의 실패에 의해서 운명짓는 것으로 생각한 것처럼, 투쟁이 소멸될 것을 두려워했으며 ‘현재의 인간의 무기력한 경주’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동양 문제》88, 104호) 공장 소유주에 대한 증오는 콥덴주의(자유무역, 평화, 불간섭주의 : 역주)의 남용과 모의 전쟁에 대한 그의 불평을 혼합하게 했다.
1870년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투쟁에서 주어진 것은 ‘혁명 전쟁’이라는 환상으로부터 ‘제한 협정’으로의 실추였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진보적 부르조아’ 혹은 민족해방전쟁으로 분류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거기에 직접 참가할 수는 없었으나, 노동계급에 보다 유리한 전망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측면에서 지원했다. 그 사이에 미국 시민전쟁이 있었는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북군의 승리를 열렬히 기대했다. 군사적 관찰자로서 엥겔스는 남부의 투쟁정신과 기술에 대해 불유쾌한 인상을 받았으며, 마르크스는 북부를 옹호하여 그 중요점을 보다 활발하게 언급하였다.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시기에 제1 인터내셔날이 존재하였는데, 노동자는 중립을 지켜야 할 지배자들의 싸움으로 평화가 침해되었다는 비난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과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이탈리아의 통일에 이어 독일의 통일을 낳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이 자국의 민중 대신에 비스마르크와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 위로부터의 통일이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런 것이라 생각한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변화를 경제적 팽창을 강화하고 그리하여 노동계급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환영하였다. 1870년의 전쟁은 나폴레옹 Ⅲ가 도발한 결과이며 독일 측으로서는 방어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 노동자들과의 화해작업이나 합병을 반대하도록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호소하였다.
일련의 사건들, 더 나아가 몇 가지의 연구는 그들로 하여금 역사상 전쟁의 비중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 견해의 일부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기묘하게도, 거의 의식적으로 전쟁에 지배적인 위치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은 사람은 엥겔스였다. 마르크스가 1957년경 초기 역사에 대한 수수께끼(이들에 대한 그의 노트-《요강》 pp. 471~514-는 그의 동료에게 읽혀진 것 같지 않다.)와 씨름하고 있을 때, 적어도 몇몇 국가에서는 전쟁이 기본적인 요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지에 대한 경쟁은 싸움을 모든 원시 농업 공동체의 주요 임무의 하나로 만들었음에 틀림없다고 그는 쓰고 있다. 그리스에서 그것은 토지 집적으로 작용했으며, 도시는 조직화의 초점으로 발전했다. 노예의 육성과 불평등의 심화로 인해 공화제가 전복될 때까지, 전쟁과 정복은 오랫동안 로마생활의 통합적 요소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엥겔스는 《반듀링론》에서, 역사란 본질적으로 ‘권력의 시험대이다.’라는 관념을 조소하면서, 《독일 이데올로기》의 주요한 주장의 하나를 되풀이했다. 이 저서의 ‘권력론’에 대해 논하고 있는 장(章)에서 그는 10년 후 보다 긴 보충을 하여 중세기 이후 독일역사로부터 그의 논제를 예증할 것을 계획했다. 그는 비스마르크가 뜻하지 않게 소독일국가의 잡다한 집단을 말소시킴으로써 부르조아 혁명 작업을 수행했으며, 그가 구축한 체제는 단지 일시적으로 지불한 대가에 불과하였음을 나타내 보이려고 했다. 서유럽은 현재 중소 민족국가의 형태를 띠어가고 있다. 이리하여 그들 사이에는 노동운동의 진보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국제적 조화가 추구될 수 있다.(‘역사에서 힘의 역할’, 1절) 이 저서는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다. 아마도 엥겔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확신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라파르그 같은 몇몇 그들의 제자들이 수년 동안 설득력을 발휘한 것은 다른 노선의 사상과 약간의 관련이 있다. 그들이 1848~49년의 사건과 크리미아 전쟁을 단지 비현실적 노력으로 파악함으로써, 현대의 군대는 사실상 단지 헌병대에 불과하고 국민을 통제 하에 두기 위하여 유지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1848년 이후 중류계급은 노동자를 두려워하며 보호를 위해 정부와 군인 쪽으로 돌아섰다고 그는 쓰고 있다. ‘이것이 현재 유럽의 군대의 비밀이며,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미래의 역사가들에게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스페인 혁명’, 1856) 그는 스페인 반혁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그의 언급은 19세기 대부분과 20세기 전체를 통하여 스페인 군대에 적용될 수 있었다. 더욱이 이것은 독립하여 정치에 관여하는 성질인 것이다. 여기에 마르크스가 고려한 또 다른 위협-특히 1851년 이후 루이 나폴레옹이 그의 쿠데타를 수행하고 왕위를 보존하기 위해, 대부분 잔인한 알제리 정복 학교에서 구성된 프랑스 장성들을 이용할 수 있던 시기에-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군대가 호전적 애국심(chauvinism)뿐만 아니라, 보다 확고한 이유에서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에게도 광범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프랑스의 농민들은 전쟁과 명예에 대한 강한 호의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군사모집이 농촌의 과잉인구를 덜어주기 때문이라고 마르크스는 쓰고 있다.(《브뤼메르의 18일》7절) 그러나 1848년 이후 그와 엥겔스는 정규군의 해체와 대체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프랑스 국민수비대(the National Guard)의 형태인 중류계급 의용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민주적인 ‘인민의 무장’에 의해 이루어질 것을 주장하였다. 즉 엥겔스가 1860년대의 의용군 운동(Volunteer movement)에 열정적으로 헌신했을 때 그는 그것을 이러한 목적을 향한 제 일보로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과 다른 국가의 사회주의당은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대신 정부는 일반 징병제도에 기초하여 정규군을 확장하였다. 여하튼 엥겔스는-레닌과 같이- 궁극적으로 대중이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사용하게 될 무장교육을 대중에게 시키고 있다는 희망에 빠졌다.(《반듀링론》2부 3장)
그 사이에 군대의 비대화와 국가 재산으로의 군대의 성장은 더욱더 혼란스러운 상태를 빚게 되었다. 무장력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었다. 반면에 국가는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을 지원해주는 부속물로 격하되었다고 그는 서술했다. 말년의 그는 점점 더 전쟁의 위협에 몰두했다. 사회주의 정당이 성장하여 이미 그 자체적으로 권력을 획득할 수 있을 때는 어떤 전쟁도 필요치 않으며 ‘혁명 전쟁’은 생각도 할 수 없다. 반면에 가공할 만한 파괴무기로 싸우는 분쟁은 사회주의와 문명에 치명적인 후퇴를 가져올 것이다. 라파르그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1886. 10. 25)에서 발칸 위기가 타오르고 있는 선동적인 힘-그들에게는 야망에 가득 찬 프랑스 장군 블랑제[Boulanger]-에 대하여,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실제적 목적은 사회적 폭동의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엥겔스는 주장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옹호한다….’ 1891년, 그는 약간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즉 독일은 러시아와 프랑스, 즉 연합국의 공격에 대항하고 자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준비해야만 한다.(베벨에게 보낸 편지, 9월 29일) 그의 논리는 1914년 재인용되었는데 그 경우, 보통사람에게는 어느 측이 침략자인지 알기 어렵다는 사실이 간과되어 있었다. 임종에 이르러 엥겔스는, 새로운 무기류는 한 정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조성하고 있으며, 분할된 대륙 간의 제휴는 시들어져 버릴 것으로 기대된다는 너무 낙관적인 생각에 집착하였다.(라파르그에게 보낸 편지 1895. 1. 22) 여러 사건과 복잡미묘한 국제관계에서 그의 생각은 상당히 유동적이었다. 즉 그의 논리는 항상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으며, 어떠한 단일 관점을 명백하게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그의 계승자는 더욱 심화되어 가는 혼란을 물려받았다. 1914년 개최된 제2 인터내셔날-지도그룹의 대부분이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준마르크스주의 추종자인-회의는 전쟁의 위협에 지배되었다. 1905년 프랑스 사회주의자 죠레스[Jaurès]는 유럽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두 가지를 예견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정확했음이 판명되었다. 즉 유럽전쟁은, 지배계급이 잘 기억하고 있듯이 혁명을 촉발시킬 것이며, 한편으로 민족적 적대감과 반동 독재의 사태가 도래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Pease 1916, p. 126) 엥겔스 사후, 인터내셔날의 지도적 이론가였던 카우츠키는 경직된 사회체계는 혁명에 의해서보다는 종종 전쟁에 의해 분쇄되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역사가로서의 그 자신을 고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불안정한 체제로 하여금 하나의 탈출 방도로서 전쟁이라는 도박을 걸게 할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좀 더 낙관적인 희망에서 폭동의 망령은 정부를 위협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30세에 이르러 그는 《권력에 이르는 길》(1907, pp. 149, 154)을 저술했는데, 이 저서에서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장기화될 전쟁을 단념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가 미래를 고찰하기만 하면, 반드시 어두운 불안감이 엄습했다. 각각의 지배 계급은 그의 이웃들이 자기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불화는 히스테리로 부추겨지고 있었다. 즉 제국주의적 팽창은 군비축적을 더욱 확장할 것이며 이것은 결국 고갈과 폭발의 지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전면적인 혁명적 변화만이 이 사태를 종식시킬 수 있다.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는 18개월 간의 복역 중에 책을 저술했는데, 거기서 그는 군국주의란 분석하기 매우 어려운,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 다양한 측면의 현상이라고 쓰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군인과 자본가는 각각 서로를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성가신 존재로 받아들일지언정 서로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즉 재정적으로 군대는 대부분의 짐이 노동자의 어깨 위에 매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근치근 들러붙는 존재이다.(1907, pp. 9, 41, 48~52) 그러한 평가가 전쟁의 원인은 자본주의에 있다는 직설적인 단언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주장이 모두 자본 자체에서 발견되어지거나 자본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저작이 쓰여진 이후 자본주의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최근 몇 십 년 간 그 구조가 변동하고 있으며 금융의 독점은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었다. 1914년 이전에는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것이 점점 자연스러운 것으로 되어갔다. 더욱이 그의 대변자는 무역에는 총이 수반되며, 국가는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파멸하느냐의 투쟁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주 단호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1912년 인터내셔날의 바슬레 회의에서는, 노동계급이 파국을 전환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들은 전쟁상태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로 인한 위기를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사적 이익을 위하여 서로를 살육하는 것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1914년에 이르러 인터내셔날은 지금까지의 사회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무능하게 분열되어 버렸다. 레닌은 이러한 분열을 전쟁으로부터 얻는 자본주의의 주요한 소득으로 간주하였다. 1914년 10월 그는 당위원회를 위해 기안한 선언에서 이 원인의 복잡성의 해명을 위한 여지를 마련했다. 즉 군비 축적, 시장을 둘러싼 첨예한 투쟁, 낡은 군주제의 심각한 이해 관계, 그리고 노동자를 분열․분리시키려는 소망 - 이들에 대한 해결책은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켜야 한다.(‘전쟁과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 그는 1915년 여름, 우익 사회주의자와의 긴 논쟁에서, 역사에 순수한 현상이란 없다. 단지 복합물일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세르비아의 국가권력은 큰 솥의 한 구성요소이지만 아주 미소한 것이다. 본질에 있어서는 모든 정부가 이 전쟁을 준비해 왔다. 즉 모두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 누가 첫 주먹을 날렸느냐고 묻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서로 다른 지역의 ‘진보적인’ 전쟁에 대해 언급했던 것을 지금 반복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제2 인터내셔날의 붕괴》)
물론 볼세비키가 여타 사회주의 정당보다도 훨씬 더 그들 국가의 패배를 희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 허약해서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앞으로 오랫동안 권력을 획득할 기회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레닌은 더욱더 배타적인 자본주의를 비난했으며, 어는 곳보다도 러시아의 취약성을 비난했다. 자본주의적 범죄는 그의 《제국주의론》을 관통하는 주제였으며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는 그것에 비교되는 결론이었다. 이 두 저작은 힐퍼딩의 《금융자본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19년 3월,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제1차 회의에서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그에 의해 지배된 세계경제의 무정부성의 폭발이라는 것으로 확고하게 진단되었다. 러시아는 현재 다른 종류의 단계, 즉 외국의 간섭과 결합된 내전의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 레닌은 이로부터 제7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회의의 보고에서 일련의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1919. 12. 5) ‘전쟁은 정치의 연속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전형이다.’ 즉 그는 어떤 다른 무엇보다도 노동자 농민에게 급속한 정치적 교육을 시키는 것은 투쟁이라고 믿었다. 전쟁이 끝날 즈음, 적군의 창설자인 트로츠키는 일련의 군사적 교훈을 지적해 내었다. 그것은 사실상 일반 상식적인 문제였다. 즉 전쟁은 전통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결코 과학을 영구법칙의 상태로 남겨두지 않는다. 또한 전쟁은 장기(chess)와는 달리 몇몇의 젊은 정열주의자가 공상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이끌어 낸 몇 개의 개념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은 아니다.(1971, pp. 113ff)
1918년 직후 공산주의자들은 또 다른 세계 전쟁의 위협을 경고하고 있었다. 러시아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손실을 가져온 1941~5년의 경험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중국과 달리) 전쟁의 방지를 인류 최고의 당면 요구로 강조하였다. 1961년 공식 선언은 실제로 모택동적 모험주의와 전쟁 불가피론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다른 공산주의당들은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가 결코 전쟁을 혁명의 길로 간주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동안에 전쟁과 사회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아직 많은 부분이 논쟁의 여지로 남아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귀중한 공헌을 하였다. 즉 그들은 독일 대기업의 책임 몫을 중시하였는데 반하여, 서구는 전쟁을 단순히 히틀러나 나치즘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처리함으로써, 독일 대기업의 책임 몫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세기 전쟁에 관한 레닌의 학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마르크스주의자의 표징으로 내세울 만한, 전쟁의 원인에 대한 종합적인 학설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러 가설 중에서 말년의 엥겔스의 가설, 즉 전쟁은 군비의 과잉축적에 의해 발생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 오늘날 가장 믿을 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 반세기 동안의 식민지 해방전쟁에 의해 보다 참신한 사고가 필요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 당시 유럽 내부의 국가건설 전쟁에 부여했던 것 이상으로 좀 더 순수한 승인(공인)을 부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식민지 봉기는 매우 광범위하게 조직화되었고 공산주의자에 의해 지도되었다. 엥겔스는 종종 그 당시의 해외 캠페인에 대하여, 즉 주로 인도 폭동과 제2차 중국전쟁(1856~60)에 대하여 썼다. 그는 제국주의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심정으로 서술했으나, 또한 그것은 화석화된 낡은 체제를 파괴함으로써 좁은 의미에서는 혁명적일 수 있다고 기대했다. 비조직화되어 있고 지도자가 거의 없는 인도와 페르시아, 중국의 투쟁 역량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빈약한 정도에 그쳤다. 내전 기간 중의 트로츠키의 저서와 연설에서는 게릴라 전술을 무정부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단호히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경험은 확고한 정치적 지도자에 의해 지도되는 게릴라 투쟁은 상당히 효과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택동과 지압[Giap] 장군 같은 인물은 가능한 한 정규군의 창출을 신속히 계속하고, 게릴라는 그에 부속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전 지역에 걸쳐서 식민지 해방전쟁은 완수되었다. 그러나 이제 1979년 중공이 공산 베트남을 침공함으로써 전쟁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새로운 전환점에 와 있다.(→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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