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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 (( 獨 Kunst, 英 佛 Art ))




1) 기술과 예술

위 외국어는 원래 꼭 우리말의 ‘예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하나의 생활상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어떤 재료를 가공ㆍ형성(形成)하여 객관적인 성과물 혹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능력 또는 활동으로서의 ‘기술’을 총칭하는데, 오늘날에도 넓게는 이러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 말은 어원적으로도 알맞은 근거가 있는데, ‘art'의 어원인 라틴어 ‘ars'에서는 ‘조립하다.’ ‘궁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kunst'는 원래󰡐알고 있다.’󰡐할 수 있다.󰡑란 의미인󰡐Können'에서 파생된 것인데, 모두 다 어려운 과제를 솜씨 있게 해결할 수 있는 특수하게 숙련된 기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들은 예술과 함께 수공업(handwerk,handicraft), 기타 실용적 여러 기술을 포괄하며, 특히 'kunst'는 과거에 학문ㆍ지식ㆍ지혜의 의미로도 쓰였다.
이러한 넓은 의미의 ‘kunst'와 ‘art'(기술, 솜씨)가 점차 넓은 의미의 ‘예술’로 한정된 것인데, 그리스어에서는 τἐΥ͵Ʋῄ와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의미영역을 가지고 ‘모방 기술’로서의 예술과 다른 여러 기술들이 미분화된 통일 상태로 포용하고 있었다. 물론 이 말은 근대어 ‘Technik', 'Technique'의 어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라틴어의 ‘ars’와, 넓은 의미의 ‘art', 'kunst'에 해당하는 말이었고, 오늘날 소위 예술 외에도 요술ㆍ흉내ㆍ마술부터 의술ㆍ건축술ㆍ요리법ㆍ전술ㆍ정치술ㆍ처세술ㆍ변론술까지도 포함한 총괄적인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모든 기술들을, 로고스를 취해 각각의 목적에 가장 적합하게 적용하고, 이에 따라서 테크네는 ‘제작’을 의미하는 ‘ποζƞơζς’와 관계된 개념임과 동시에 넓은 의미의 ‘인식’의 특수한 하나의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식은 지각→기억 →경험→테크네→학문의 순서로 여러 단계들을 거쳐 높아지는 것이고, 테크네는 경험과 학문의 중간에 있으면서 그 양쪽에 걸쳐 있는 것이다. 또 테크네 내에서도 단계가 나누어진다. 낮은 차원의 테크네(예를 들어 요리법)은 개개의 현상에 대한 지식인 경험에 근거할 때만의 숙련이고 이론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참된 의미의 로고스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높은 단계의 테크네(예를 들어 의술)는 사물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 기초한 보편성의 인식과 원인ㆍ근거의 파악으로써 학문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러한 단계는 동일한 테크네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건축가는 건물의 전체적인 의의를 알고 건물의 목적과 형상을 자신의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데 비해, 오로지 경험에만 의존하는 직인은 각각의 담당하는 작업의 부분적 지식을 가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학문은 진리인식 그 자체가 목적인 데 반해, 테크네는 제작활동 자체보다도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성과가 본래의 목적이다. 또 학문은 항상 보편적 대상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지만, 테크네는 개개의 구체적 사실에 대해 유효한 능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즉, 테크네의 중요한 특징은 경험과 학문의 중간에 있고 보편과 개별을 연관 짓는 것, 바꿔 말하면 이론ㆍ법칙을 특수사상(事象)에 적용하는 점에 있다.〔테크네의 이러한 특징은 예술의 상징적 성격의 기초가 된다.〕
테크네는 또 로고스의 자유로운 내면적 사고 활동을 통해 제작ㆍ형성되는 활동으로 외면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성의 원리를 따르는 자연과는 다르다. 자연의 운동ㆍ변화의 원리가 생성하는 것 자체에 내재하는 데 비해, 테크네의 경우에는 제작되는 것 외부에 제작자가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양자는 다르다. 또 실천적 행위에서는 ‘잘 하는 것’ 자체가 궁극적 목적인 행복을 달성하지만, 테크네에서는 그것의 산물도 목적 그 자체가 아닌 어떤 것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합목적성의 단계에서는 테크네가 자연과 실천적 행위의 중간에 위치한다.
테크네 일반에서 예술의 특수한 성격을 두드러지게 하고 다른 여러 기술들과 구별하는 작업은 역사적으로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이루어져 왔다. 기원 전 3 세기 헬레니즘시대에 점차적으로 단순한 수세공 작업과는 다른 미술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확연해졌다. 그는 효용성의 측면에서 테크네를 둘로 나누고, 하나는 생활상의 ‘필요에 의한 기술’, 다른 하나는 ‘기분전환과 쾌락을 위한 기술’이라고 했다. 전자는 실용적인 여러 기술들을, 후자는 이른 바 예술을 가리키는 데, 그것은 예술의 미적 향수까지 필연적으로 전개해나간다.
그러나 예술의 미적 의미에 한정된 Kunst, 즉 예술이란 관념은 18세기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부각된 것이고, 예술을 일반적인 기술과 구별하기 위해 특별히 schöne Kunst, fine art, beaux arts(미적 기술)라는 표현이 쓰이게 된 것이다. 그 후 칸트는 기술일반의 고찰에 기초하여 ‘효용적 기술’(nützliche Kunst) 또는 ‘기계적 기술’(mech anische K.)과 ‘직감적 기술’(ästhetische K.)로 나누고, 후자를 다시 둘로 나누어 단순한 감각표상의 즐거움을 목적으로 삼는 것을 ‘쾌적한 기술’(angenehme Kunst)이라고 하고, 인식 양식인 표상의 즐거움을 목적으로 삼는 것을 ‘미적 기술’(schöne Kunst)이라고 했다. 마지막 것이 예술에 해당하는데, 칸트에 따르면 이것은 ‘이론적’ 학문과 결과만을 위해 ‘강제적’으로 맡겨진 공업적 기술과 구별되는 ‘자유로운 기교’라는 특색을 가진다.
이리하여 실용적 기술과는 구별되는 좁은 의미의 Kunst는 더욱 좁은 의미로 기술적 형성활동이라는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 예술, 즉 조형예술(미술)에 국한되기도 하지만, 예술적 의미에서는 조형예술 외에도 음악ㆍ문예ㆍ연극ㆍ무용 등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미적 가치의 실현을 본래의 목적으로 삼는 기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칸트 이후의 미학에서는 예술이 이렇게 해석되면서 미적 가치원리가 부각되었는데, 종래에는 그것을 구속하고 있던 실용적 또는 윤리적 평가로부터 해방되어 예술은 고유의 자율적 가치영역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2) ‘미적’ 과 ‘예술적’

예술의 본질적 계기를 미적 가치(넓은 의미의 미)로 들리는 미학 이론에 대해서 드소와, 우티츠 등에 의해 예술학(일반예술학)의 주장이 제기된 이래 예술과 미와의 관계가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 입장에 따르면 ‘미적’이란 개념은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할 수 없다. 예술의 창조적ㆍ형성적 측면에 주목해야 하기 때문에 ‘미적’ 대신에 ‘예술적’ (das Künstlerische)이라는 개념이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주장은 여러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제기된 것이다. 드소와에 따르면 미적관조가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즐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반대로 예술은 정신적ㆍ사회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쾌감 외에 지식과 의지와도 결합되어 있다. 또 예술작품의 감상에는 거기에 나타난 예술가의 인격성이 향수되지만 자연의 미적 대상을 관조하는 데에는 이러한 계기가 없다. 우티츠도 미적 관조와 예술 활동을 구별하여, 전자는 대상이 줄 수 있는 인상에의 전적인 감정적 귀속이지만, 후자는 이것에 비해 감정체험의 순수한 형성적 표현이라고 한다. 예술이 미적 가치 외에 종교적ㆍ정치적ㆍ지적 가치 등을 실현한다는 점도 그가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예술에서는 창작의 바탕을 이루는 예술가의 창조적 인격의 개성, 혹은 이것을 배후에서 제약하고 배양하는 모태인 민족정신과 시대정신의 특성에 기초하여 예술적 형성의 유형으로서의 양식의 분화ㆍ발전을 낳는데, 이것이 예술학적 연구에서는 뵐플린 이후 특히 중요시되고 있다. 양식의 현상은 본래의 의미에서 볼 때 문화, 특히 예술과 같은 정신적 창조에서 문제시되지만, 자연미의 경우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과 관련하여 예술창작에서는 표현재료의 형성에 관한 기교가 북가결한 요소로 남아 있고, 이것에 따라서 예술향수에는 기교의 정도에 대한 찬탄의 정이 보통 중요한 인자로서 덧붙여지지만, 이것도 물론 자연미의 향수에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적 가치와는 별도로 예술적 가치를 성립시키는 것으로서 들었던 여러 계기들도 더욱 곰곰이 생각해보면 양자를 준별하기에 반드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어찌했든 예술은 때때로 여러 가지의 비미적 가치 내용을 포함하고 이것을 가지고 사회생활 속에서 강력한 기능을 발휘하지만, 그들 요소는 우연히 예술에 뒤따른 것이지 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미적 가치야말로 예술의 본질상 빼놓을 수 없는 필연적 계기이다. 다음으로 예술 특유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개성적 인격성과 이것에 기초한 창조적 형성도 실은 일반적으로는 미적 체험에 포함되어 있다. 예술가가 그 개성의 법칙에 따라서 소재를 파악하고 형성하여 그의 작품에 독자적인 양식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미적 관조에서도 우리는 각자가 고유하게 보는 방식으로 주어진 현상을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내면적으로 형성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일종의 양식화를 포함하는 인격적 창조 작용이 적용되고 있다. 다만 예술창작에는 일정한 물질적 표현재료를 가지고 내면적 형성을 외면적으로 끌어내는 ‘마무리’(Au sführu ng) 작업이 필요하며, 여기에 기교라는 계기가 덧붙여지는 것이지만, 이것도 예술적 표현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고 예술 본래의 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봉사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로서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데스와르, 젬퍼 등이 강조하는 것처럼 예술에서 기교의 의의를 경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결국 예술은 다른 여러 기술들이 유용성이란 가치를 추구하는 것과는 반대로 미를 핵심적 가치내용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예술이 가치내용에서는 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활동형식에서는 기술의 영역에 속하는 한, 그 본질을 단순히 미적인 것으로 귀속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술적인 것이 미적인 것과 구별되어야만 한다면, 그 차이는 근본적으로 전자가 후자에 의거하는 것이면서도 기술적인 것에 의해서도 규정된다는 점에 있다. 거기에서 예술은 미학의 주요 대상으로서 연구되는 것이 아니며, 기술철학의 관점에서 다른 여러 기술들과의 공통된 기반위에서 해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미적 가치가 있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테크네이자, 기술에 의한 미의 인공적 생산이기 때문이다.

3) 예술의 본질

예술의 본질 규정은 미와 예술의 본질을 전제로 하는데, 크게 나누어 다음 세 개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1) 예술품(Kunstwerk)의 객관적 존재를 주안점으로 삼는 경우, (2) 예술가(Kunstler)의 주관적 창조 작용〔또는 이것에 대응한 대중(publikum)의 관조 작용〕을 주안점으로 삼는 경우, (3) 예술 그 자체를 문화의 한 영역, 또는 문화가치의 한 형태로 보는 경우이다.
(1) 의 관점에서는 예술의 본질이 내용에 있는지, 형식(또는 형성)에 있는지, 혹은 쌍방의 결합방식에 있는지가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내용은 표현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표현되는 것은 외계의 사물적 대상으로서 주어진 소재(題材)든, 주체의 내면에서 체험된 의미와 감정ㆍ기분이든, 일정한 형식으로 표현되고 형성되어야 비로소 본래 내용으로 되는 것이며, 형식이나 형성방식이 내용을 규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소재 또는 소재적 경험내용이 그 성질과 종류에 따라서 예술가의 창조적 형성을 제약하고 작품의 형식을 규정한다는 문제도 있다. 더욱이 작품이 각 부분의 창조적 종합으로 이루어지는 유기적 전체라고 한다면, 내용은 부분에 해당되고 형식은 부분을 전제로 결합하는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내용과 형식의 통일이 바탕을 이루는 것으로서, 작품의 단순한 외면형식으로부터 구별되는 예술가의 내적 파악 및 형성의 법칙, 미적 창조활동으로서의 내용과 형식을 명확히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오히려 예술은 양자의 불가분한 통일에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을 내용과 형식의 통일체인 작품의 측면에서 규정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 존재구조가 해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티츠에 따르면, 예술품은 색, 소리, 말 등의 ‘재료’(Mate rial), 대상에 대한 적극적 혹은 소극적인 ‘예술태도’(Kunstverhalten), 소박적(naiv)․ 정념적(sentimentalisch)인 ‘표현방식’(Darstellungsweise),윤리적ㆍ미적ㆍ관능적인 ‘표현가치’(Dar stellungswert), 자연주의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이라고 하는 등의 작품을 지탱하는 이념적 토대로서 ‘존재층’(Seinsschicht)의 다섯 가지 계기로부터 이루어진다. 또 최근의 존재론적 입장에서는 N.하르트만과 우리들에 대해 현상하는 후경(後景)의 중층관계로부터 설명하고, 후지를 더욱 많은 층으로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E. 수리오와 같이 예술품을 물리적ㆍ현상적ㆍ사물적ㆍ초월적이라는 네 개의 존재양태의 층으로부터 구성된 것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2)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술 활동의 본질이 자연 또는 현실의 모방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이에 비해 그 본질을 오히려 주관적인 감정의 표출로 귀착시키는 이론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예술적 표현은 (적어도 사물적 예술에서는)외적 대상을 모방ㆍ재현하는 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항상 내적 상태의 표출을 필수적인 계기로 삼아 여러 가지 정도에 따라 이루어지는 양자의 협동통일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에서는 특히 예술학적 또는 양식철학 입장에서 강조되는 것처럼 일정한 개성적ㆍ법칙 형식에 따른 형성 활동이 더해져야만 한다. 예술은 ‘창조적 표현방식’이다. 또한 예술적 창조에서는 직접으로 드러낸 감각적이고 개별적인 것을 통해서 존재의 근원이거나 인생의 의미거나 하는 초감성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구상적으로 제시되거나, 또는 예술가의 인격성과 이것에 기초한 총체 감정(기분)이 구현되는 경우 상징도 예술의 본질적 특징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 예술의 기능을 ‘표출’ㆍ‘현실표현’ㆍ‘미화 또는 완성’ㆍ‘상징적 의미’ 라는 네 가지로 꼽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계기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작용에 대한 규정은 주로 창작활동에 대해 이루어진 것이 보통인데, 그렇다고 하여 이것에 대응하는 향수(관조)의 활동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에서는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예술가의 창작체험과 대중의 향수체험이 그 본질적 구조에서는 상호 일치해서 조응하고 있고, 거기에서 이른 바 창작 - 작품 - 향수의 삼위일체가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통일은 특히 현대 미학에서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베커와 같이 창작과 수용 양면에 공통된 근원을 비전(Vision)이라고 한다면, 예술의 본질은 일종의 환상적 직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두 개의 관점에서 내려진 규정은 예술의 내재적 규정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3)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은 일정한 가치에 관계된 본래 의미인 ‘정신적’인 존재로서 문화의 특수한 영역의 하나이며, 일정한 이념을 지도 원리로 하는 정신적 가치창조의 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그 자체가 고유한 의의와 원리를 가지면서도 광범한 존재층과 가치체계 안에 자리 매겨져 외재적인 규정을 받는다. 예술에 대한 철학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는 반드시 이 점에 맞부딪치게 되는데, 그러한 경우 가끔 예술은 마찬가지로 이념적 문화인 종교와 학문, 특히 철학과 비교되곤 한다. 그것은 헤겔에서는 직관 형식의 ‘절대정신’으로서 종교와 철학에 선행하는 단계를 이루고 있으며, 딜타이에서는 이들 양자가 공히 세계관의 유형적 표현의 한 형식이 된다. 크로체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실천적(prartica)인 것과 인식적(teore tica)인 것으로 나누고, 전자가 실용적ㆍ경제적 단계로부터 점차 도덕적 단계로 높아지는 것 반대로, 후자는 예술적 단계에서 철학적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철학이 지성에 의해 사물의 일반적 관계를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상상에 의해 사물의 개성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N. 하르트만은 문화나 생의 영역에서 역사적 구조를 해명하여, 종교에서는 생이 전체적으로 절대적인 과거의 계시로 향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과는 반대로, 기술(과학적 기술)에서는 과거와 단절하고 순수하게 현재 속에 살아있다고 한다. 이들 중간에 서 있는 예술에는 과거 작품에의 귀의와 새로운 창조에의 고뇌가 공존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역사적 현상에 비추어보아도 예술은 종교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고대ㆍ중세 예술은 신적건축과 신전의 장식으로서, 신상의 조각으로서, 제사에 수반되는 연극으로서, 예배의 음악으로서 발생ㆍ발달해 왔고, 종교적 신앙의 언어적 표현은 그 자체가 문예이기도 했다. 어쩌면 종교는 그 가장 심오한 내면성에도 불구하고 그 직접ㆍ초합리적 성격에서 예술과 상통하여 예술에서 가장 우수한 직관적 표현형식을 획득했던 것이다. 종교와 예술의 이러한 관계는 매우 깊고 근원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근세 이후에는 도리어 예술이 종교로부터 독립하여 예술의 자율성을 보다 높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더 넓게 본다면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ㆍ사회적 생활 전반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의 생을 초탈한 독립된 존재이다. 여기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lárt pour lárt)과 ‘인생을 위한 예술’(lárt pour la vie)이 대립되는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전자는 근대에 들어와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고조되었던 것인데, 예술을 다른 목적과 조건에서 해방시키고 순수성을 지키자는 주장은 그 자체만으로는 당연한 요구이지만, 그것이 한 방향으로만 추진되자 유미주의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예술의 미적 창조를 지상목적으로 삼고 인생의 가치들을 모두 이것에 종속시키려고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후자는 예술이 인간의 도덕적 선도, 품성의 도야, 사회의 개선에 일익을 담당하고 인생에 기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오래 전부터 특히 문예관을 지배했던 사상이었는데, ‘예술을 위한 예술’이 제창되자 다시 한 번 이것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주장되었다. 귀요와 같이 미적 감정의 원리가 개개의 생이 사회적인 것으로 확충되도록 도와주는 ‘사회적 공감’(sympathie socile)이라고 하면서 예술의 본질ㆍ목적을 사회적 감정의 환기에 두는 이론은 미학에서의 이 입장에 기초하는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와 같이 예술이 종교적ㆍ도덕적 생활에 봉사해야만 할 것을 강조하기에 이르면 이 입장도 극단적인 편향을 띠게 된다. 그러나 생활과 예술 관계에 대한 두 개의 주장은 필경 각각의 입장에 서서 일면적인 진리만을 역설한 것이며, 원리적으로 볼 때는 서로가 반드시 모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상 경향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만년의 니체나 딜타이와 같이 예술 그 자체를 생의 근원적인 힘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술을 위한 예술’과 ‘인생을 위한 예술’은 고차적인 통일로 충분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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