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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노스의 미학]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후 약 5 세기가 지날 무렵, 고전적 세계가 바야흐로 종언을 고하려 할 때 나타난 플로티노스(204~269)는, 일체의 존재를 초월한 일자(一者)로부터의 삼라만상의 유출과 테오리아를 통한 삼라만상의 일자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웅장한 종교적 ․ 형이상학적 체계 위에서 고전 그리스 ․ 로마의 철학사상을 집대성했다. 신플라톤헉파의 대표자인 플로티노스의 사상은 주로 플라톤*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원용하여 이것을 체계화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신비주의적 경향과 전체적 통일로의 강렬한 지향은 당시의 정치적 ․ 사상적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또한 헬레니즘 및 고전 로마의 전성기를 통하여 축적된 경험적 지식과 취미의 변천은 폴리스적 세계에 속했단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1) 미론(美論)

(1) 플로티노스의 사상은 그의 제자인 포르피리오스(232~305)에 의해 편찬된『엔데아데스』라는 54편의 논문집에 남김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미에 대하여」및「예지미(叡知美)에 대하여」라고 하는 두 편의 논문을 통해, 우리는 그의 미에 관한 사상을 대체로 알아 낼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자연과 예술의 감각적인 미와 초감성적인 예지미를 명확히 구별했다. 예지미가 감각적인 미를 성립시키는 근거임과 동시에 그 자체가 미인 것에 반해, 감각적인 미는 예지미를 나누어 가지며 이를 모방함으로써 비로소 미가 될 수 있다. 플로티노스의 이러한 미에 대한 존재론적 구별은 일찍이 플라톤이 말했던 미의 단계설과 흡사하지만, 일자→누우스(자기동일적인 초감성적 사유존재)→ 영혼→자연→질료로 연결되는 그의 존재론적 체계는 플라톤보다도 한층 견고한 원리적 기초 위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미는 마치 빛이 그 광원에서 멀어질수록 밝기가 약해지듯이, 누우스적인 미 자체로부터 감각적인 단계로 내려갈수록 무형상적인 추(醜)의 원리인 질료와 결합되어 불순한 것으로 된다. 따라서 개별적인 존재자의 모든 계층은 누우스에서 유래하는 형상적 원리에 따르느냐, 아니면 무형상적인 질료의 힘에 지배되느냐에 의해 미인가 추인가라는 판단이 내려지는 것이다. 가령 건축가는 어떤 건물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형상에 비추어 보아 합치되면 그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 판단의 규준으로 된 형상은 건물에 감각적인 미를 부여한 자연의 형상과 근원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성질의 것이 동일한 성질의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의 이러한 근원적인 입장으로부터 세 개의 특출한 결론이 도출된다. 즉, ① 미를 성립시키는 원리는 초감성적 ․ 이성적 존재라는 점〔색체 같은 것도 그에 의하면 형상적인 것이다, ② 자연의 미와 예술의 미는 모두 이 원리에 따르는 것이므로 양자의 본질적인 구별은 없다는 것, ③ 감각적인 미의 근거인 미 자체가 순수 ․ 단일한 것이기 때문에, 미의 원리로서 균제*를 생각했던 선인(先人)의 학설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특히 균제설*에 대해서, 추한 것의 복합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동일한 균제를 지니는 얼굴도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 또한 황금과 밤의 빛남(별), 그리고 단순한 음성과 같은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학문 ․ 덕과 같은 정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미를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 등을 지적하고, 그리하여 균제 역시 거기에 본래의 미의 원리가 부가됨으로써 미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균제설은 그의 형이상학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플로티노스의 미론에는 또 하나의 특이한 관점이 있다. 그것은 일자로의 회귀에 작용하는 미의 역할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은 질료적인 것의 작용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을 정화시킨다. 밖으로의 행위보다 안으로의 관조(觀照)를 중요시했던 플라티노스는 인간에게나 자연에게는 일자에의 동경이 있기 때문에, 양자가 모두 미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것을 ‘테오리아’라는 말로서 통일적으로 표현했다. 테오리아는 대상을 직관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자기를 대상과 동일화시키는 영혼의 활동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미는 무엇보다도 테오리아의 대상이며 보여진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미의 표현적 계기를 중요시했던 데 비해 매우 특이한 관점이다.
테오리아가 감각적인 미를 통하여 초감성적인 예지미를 향할 때, 영혼의 누우스적 성격이 강하게 되고, 미를 바라보는 것은 자기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질료와 결부된 다양한 외적 세계로부터 벗어나 자기와 동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사람은 사물을 보지 않고 눈을 감기 때문에, 외부로 나타나지 않는 ‘위대한 미’를 다른 눈으로 관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플로티노스는 여기서 만족하여 멈추지 않는다. 테오리아의 궁극에 도달하는 사람은 위대한 예지미를 관조함으로써 엑스타시스에 빠지고, 누우스로서의 자기로부터 탈피하여 일체의 존재, 유(有)와 무(無)의 피안에 있는 일자(一者)인 ‘절대미’ ․ ‘초월미’와의 자기동일성을 체험한다. 여기에 이르게 되면 이미 미는 신비적 종교체험을 비밀스럽게 행하는 상징적 표현에 지나지 않게 된다.

2) 예술론

플로티노스의 예술에 관한 주장은 대개 자연이나 윤리적 행위를 논하는 경우에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며, 그가 예술 자체를 독자적으로 논한 일은 없다. 그러나 한 두 가지 점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또 다른 견해를 보여준다.
플로티노스는 자연미*와 예술미* 모두를 누우스인 미 자체의 영상으로서 나란히 고찰할 뿐 아니라, 자연의 생성과 예술가의 제작을 서로 대비시킨다. 즉, 미는 예술에 의해 가옥과 같은 것에 나타나지만, 그 어느 것이든 누우스로부터 로고스와 형상을 나눠받음으로써 아름다운 물체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과 나란히 있는 예술 작품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연적 사물의 모방*이어서는 안 되고, 자연의 미를 성립시키는 원리를 모방해야만 한다. 또한 예술의 제작이 사물에 대한 감각적 모방에 지나지 않는 경우에 예술은 자연보다 열등하다. 그러나 자연의 형성 원리인 로고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감각적 사물에는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보충할 경우, 예술은 자연보다 훌륭한 것이 된다. 이것을 플로티노스는 페이디아스*의 제우스상을 예로 들어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국 예술을 제작할 경우,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이념을 표현하고, 표현의 매체로서의 자연적 사물을 이상화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이렇게 예술가가 모방하고 표현해야할 이념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 누우스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적인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지 추리에 의해서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예술가가 이러한 직관적 파악을 완수하고, 그 위에서 다시 감각적 사물에 접근하여 그 본질을 포착하고 표현했다면, 그 예술은 ‘훌륭한 참된 미’ 그 자체이다.
이러한 플로티노스의 예술론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상술한 바와 같이 자연을 형성하는 힘과 형성된 것에 명확히 구별된 단계를 설정했듯이, 예술에 관해서도 작품보다는 예술가를, 예술가보다는 제작의 원리를, 일자를 향한 한층 근본적이고도 한층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예술의 미도 작품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예술가의 마음속에 아직 감각화 ․ 외재화 되지 않은 채 이념의 표상으로 남아있을 때 보다 고차적인 미인 것이다. 또한 그의 미적 사상의 성격상, 조형예술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표명한 것이 비교적 많다는 것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플로티노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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