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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혁명
주명철 지음
출판사 - 여문책
초판일 - 2018-05-31
ISBN - 제2의 혁명
조회수 : 192

● 목 차

시작하면서

제1부 입법의회
1. 입법의회 개원과 초기 활동
2. 망명자들에 관한 법
3. 비선서 사제들
4. 국가 안전과 방어를 위한 대책
의용국방군 / 국립헌병대
5. 바이이와 라파예트의 사임과 선거
6. 1791년 말의 정세
7. 전쟁에 대한 토론

제2부 전쟁과 ‘제2의 혁명’
1. 민중협회들의 활동
2. 여성도 창을 들게 하라
3. 루이종이냐, 기요틴이냐?
4. 새로운 내각
5. 평화냐, 전쟁이냐?
6. 샤토비외 병사들을 위한 잔치
7. 선전포고
8. 튈르리 궁 침입
9. “조국이 위험하다”
라파예트의 파리 출현 / 조국이 위험하다 1 / 라무레트의 포옹 / 페티옹의 직무정지 /
조국이 위험하다 2 / 페티옹의 복권 / 제3회 전국연맹제
10. ‘제2의 혁명’
포병들의 잔치 / 전방 소식 / 파리 시정부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다 /
루이 16세를 폐위하라 / 샹젤리제 사건 / 브룬스비크 공의 선언 /
라파예트 혐의 없음 / ‘제2의 혁명’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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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7

2015년 12월,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1, 2권 출간을 시작으로 매해 두 권씩 시리즈를 이어온 주명철 교수의 성실함이 빛을 발하는 제7권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마침 30년 만에 맞이한 개헌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채 6월 13일 지방선거를 앞둔 우리의 사회 상황과 절묘하게 겹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전 세계 혁명의 맏형 격이자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헌법을 기초로 정치체제, 사회구조, 문화의 근간을 뿌리부터 바꾼 데 있다. 오랜 세월 절대왕정을 이어온 프랑스가 제헌의회와 입법의회를 거치며 끊임없는 논란과 갈등 속에서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선언)'의 정신을 바탕으로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이에 따라 정치사회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과 유혈사태가 빚어진 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갈등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고, 민중의 삶이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서 대외전쟁에까지 휩쓸리게 되자 국회 안에서는 날마다 전쟁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물리적 충돌과 유혈사태로 개헌을 촉발한 ‘제2의 혁명’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성문헌법을 적용해서 민주적 선거로 뽑은 입법의회는 1791년 10월 1일부터 법을 만들면서 국내외의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종교인들은 헌법에서 공무원의 지위를 얻었으며, 헌법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해야 했지만 거부하거나 철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주의자들은 단원제 국회를 영국식 양원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종교인과 귀족주의자들은 나라 안팎에서 헌정을 파괴할 목적으로 군대를 모으고 외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내전을 부추기는 동시에 외국으로 망명한 왕족들과 내통하고 외국 군주들의 지원을 얻어 대외전쟁까지 부추겼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는 1792년 4월 20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개전 초기부터 고전하면서 국내의 불만세력이 국회와 왕을 더욱 압박했다. 결국 왕과 그 지지자들의 비협조적인 처신에 불만을 품은 상퀼로트 계층이 1792년 8월 10일에 왕의 폐위를 부르짖으면서 봉기했다. 왕은 가족과 함께 튈르리 궁에서 나와 입법의회로 피신했다. 입법의회는 상황을 보면서 개각을 단행했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제2의 혁명’이 일어났다.

문화혁명을 이룰 여건과 가능성은 이미 나타났다. 우리는 1792년에 프랑스에서 ‘제2의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냉전체제의 사고방식에 젖은 사람들이 남북분단을 고착화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틈만 나면 국민을 억압하고 정권을 잡아 연장할 궁리만 하기 때문이다. 국군과 정보기관들을 이용해 민간인과 정치인들의 약점을 캐고, 여론을 조작하고, 선거에 개입하고, 국민의 세금을 정권안보와 사리사욕을 위해 마구 남용한 사례가 지난 1년 동안 하나둘씩 드러났다. (……) 신상필벌의 원칙을 제대로 적용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촛불혁명’을 ‘문화혁명’으로 정착시킬 수 있다.

◆ 새로운 국면으로 도약한 혁명

2015년 12월,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1, 2권 출간을 시작으로 매해 두 권씩 시리즈를 이어온 주명철 교수의 성실함이 빛을 발하는 제7권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마침 30년 만에 맞이한 개헌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채 6월 13일 지방선거를 앞둔 우리의 사회 상황과 절묘하게 겹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전 세계 혁명의 맏형 격이자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헌법을 기초로 정치체제, 사회구조, 문화의 근간을 뿌리부터 바꾼 데 있다. 오랜 세월 절대왕정을 이어온 프랑스가 제헌의회와 입법의회를 거치며 끊임없는 논란과 갈등 속에서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선언)’의 정신을 바탕으로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이에 따라 정치사회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과 유혈사태가 빚어진 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갈등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고, 민중의 삶이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서 대외전쟁에까지 휩쓸리게 되자 국회 안에서는 날마다 전쟁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한편 사회적으로도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자유를 맛보며 점차 정치의식이 깨이기 시작한 여성들이 정치무대 전면에 나서서 자신들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 절실한 요구는 남성 의원들의 야유 속에 묻혀버리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시민의 아내나 딸’로만 살아갈 것을 강요받게 된다. 또한 죄인의 사형마저 신분에 따라 차등하는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등장한 처단기계 ‘루이종Louison’(의사 루이의 이름을 딴 것)이 인도주의를 강조한 의사 기요탱의 이름에서 비롯된 ‘기요틴’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고 혁명이 급진화하는 과정에서 더욱 자주 쓰이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혁명의 확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으로 입소문과 함께 인쇄물을 꼽을 수 있는데, 당시에도 ‘가짜뉴스’가 어마어마하게 판을 쳤으며 이를 규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 붉은색 프리기아 모자가 혁명의 상징으로 굳어지고, 급기야 1792년 6월 20일에 상퀼로트 계층(민중)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튈르리 궁으로 몰려가 왕의 처소 문을 도끼로 내리친 뒤 왕에게 그 모자를 씌우고 함께 포도주를 나눠 마시며 형제애를 확인했지만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해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 결과 8월 10일에 왕정을 폐지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는 한 달 뒤에 있을 ‘공화국 선포’의 첫 단추를 꿰는 날이자 앞으로 벌어질 더 큰 학살의 예고편이었다. 그날 상퀼로트 계급이 폭력을 휘둘러 혁명의 적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안겨주었고, 이로써 혁명은 새로운 국면으로 도약했다.

◆ 밀실에서 광장으로

광장은 본디 실내에서 탄생했다. 서구 계몽주의 시대에 실내에서 신분을 뛰어넘은 인간관계가 ‘대화의 광장’을 만들었고, 그 광장을 외부로 끌고 나왔다. 엄혹한 독재권력 시절,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이 우리 사회에 던져준 묵직한 화두가 생생히 되살아난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의 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광장이 차벽으로 막힌 ‘밀실’이던 때가 엊그제였지만 2016년 가을부터 촛불의 물결이 넘실대는 진정한 광장이 되었음을 보면서, 1792년 프랑스 샹드마르스 광장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789년 7월 14일 샹드마르스 광장에는 왕이 소집한 군대가 주둔했다. 1년 뒤에는 거기서 국민화합의 대잔치인 전국연맹제를 열었다(제3권 참조). 다시 1년 뒤에는 학살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제6권 참조), 1792년 봄에는 민중의 힘으로 화합의 잔치를 열게 되었다. 광장의 진화가 곧 민주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함을 잘 알 수 있다.

예로부터 광장은 권력자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백성에게 주는 공간이었다. 왕은 광장을 조성하고 한가운데 자기의 기마상을 세웠다. 자기가 직접 나가지 않아도 기마상이 대신 백성을 굽어 살피고 왕국의 질서를 유지했다. 교회나 시청 앞에도 광장이 있었지만 오롯이 권력자의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찾은 시민들이 광장을 만들었다. 바스티유 요새를 정복하고 허문 뒤에 생긴 광장은 자유시민들이 만든 것이다.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쓰던 샹드마르스 광장도 새 세상을 만든 시민들이 중요한 잔치를 벌이는 곳으로 바뀌었다. (중략)
이러한 광장을 하버마스J. Habermas는 “부르주아적 공론영역”이라 규정했다. (185쪽)

주명철 (지은이)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에서 2015년 8월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공부한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애쓰고, 역사교사가 될 학생들에게도 이른바 ‘꼰대’가 되어 우리말을 정확하게 쓰라고 닦달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말해도 듣는 사람이 들을 생각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사실만 계속 확인했지만, 되도록 그런 말만 하라고 나라에서 주는 월급의 무게를 이겨내고자 비교적 성실하게 살다가 정년퇴임했다. 지나온 과정을 돌이켜볼 때, 내가 만난 학생들은 반드시 가르쳐야 알아듣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공감하려고 노력하되 섣불리 좋다거나 싫다고 판단하지 않고 당대의 공동선에 비추어 판단하려고 애쓰리라 믿으며 안심한다. 그러나 늘 사실과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개인의 경험을 되살려 타인의 경험을 재체험하고 공감하는 교육자가 되라고 분명히 말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내가 퇴임한 후에 급변한 정치 상황과 그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수많은 매체가 날마다 ‘팩트’라고 전한다. 과연 진실성을 믿을 만한 ‘사실’이 몇 개나 될까? 따분하고 화나는 현실에 마음공부를 하자고 결심하고 불가의 고승들이 모든 물질과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를 본받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모든 판단은 역사적 판단’이라는 점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현실세계에서는 물질과 정신이 인연에 따라 얽히고설켜 있지만, 역사적 판단으로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곁가지를 하나하나 떼어내는 작업은 세상의 본모습에 다가서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않는다. 게다가 글쓰기는 몸이 기억하는 직업병이다. 그래서 ‘이판사판역사판’을 마음에 새기면서, 진실·사실·팩트가 뒤섞이고 과거·현재·미래가 뒤얽힌 글을 자유롭게 쓰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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