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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 박소영옮김
출판사 - 오월의봄
초판일 - 2018-02-27
도서소장처 - 노동자의 책
조회수 : 74

책 소개

여성들이여, 반격하라!

강간과의 전쟁을 선포한 치열하고 강력한 페미니즘 고전

강간 문화를 떠받쳐온 모든 남성들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강간에 맞서 싸울 여성들에게 건네는 강력한 무기.

강간의 뿌리 깊은 역사와 우리 시대의 강간 문화를 대서특필하며 출간 직후 폭발적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화제작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법, 제도, 경찰, 프로파일링, 전쟁, 혁명, 인종, 노예제, 대중문화, 정신분석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강간 관련 자료를 수집, 연구, 비판한 수전 브라운밀러의 고전이 완역 출간된다. 이 책에서 브라운밀러는 성폭력에 대한 획기적인 서술을 통해 강간이 한낱 정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범죄라는 점을 부각했다. 이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강간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남성연대male bonding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폭로했다. 남성들의 강간 문화는 실제 강간 범죄부터 언론, TV, 영화, 문학, 음악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대중매체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전 영역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주요 언론과 독자들로부터 ‘대중들을 남성과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 안내할 기념비적 저작’이라는 극찬을 이끌어낸 것은 물론, 실제로 성폭력 관련 법 개정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았다.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책 100권(뉴욕 공립 도서관)으로도 선정되었다.
남성연대가 강간이라는 정복 행위를 통해 어떻게 여성을 항구적인 두려움의 상태에 가둬두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이 책은 브라운밀러가 장장 4년간 뉴욕 공립 도서관에 파묻혀 강간 관련 역사 기록을 뒤지며 닥치는 대로 섭렵하고 고군분투한 결과물이다. 집요한 끈기와 열정 끝에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신문 기사와 잡지, 사료, 재판 기록, 증언록, 자서전, 수기, 문학, 대중문화 텍스트와 같은 방대한 자료들을 풍부하게 녹여낸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브라운밀러는 이런 자료들을 날카로운 풍자와 냉소, 위트를 겸비한 특유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또한 자료 해석에 그치지 않고 여성의 관점에서 강간에 대한 정의를 새로 쓰며 여성들을 향해 맞서 싸우자는 의지를 깨우기도 했다.

저널리스트이자 활동가로 집필을 시작한 저자는 1971년 ‘뉴욕 급진 페미니스트 강간 말하기 대회’와 ‘강간 학술 대회’를 주최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증언을 접한 뒤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강간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가 연구를 시작한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도서관에는 ‘강간’이라고 분류된 색인조차 없었고, 체계적인 자료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었다. 브라운밀러는 각종 도서관과 경찰서, 군 기관, 법정 등을 찾아다니며 온몸으로 난관에 맞섰다.

여성의 목소리로 ‘강간’을 말하다

강간의 오랜 역사는 물론 남성 중심적으로 조직된 만연한 ‘강간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지금 여성들의 현실에 몰두한 이 책은 미국은 물론 한국 사회에도 깊은 영감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한국은 2016년 10월의 문화계 성폭력 고발, 여성 검사의 내부 고발로 촉발돼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최근의 미투 운동(#MeToo) 등 여성들이 직접 나서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늘어나고 있다. ‘강간 말하기 대회’ 현장을 비롯해 ‘강간 재판’ 및 강간 관련 언론 보도 현장을 발로 뛴 경험에서 우러나온 브라운밀러의 진단은 따라서 최근의 사건들을 사유하는 데 강력한 도구를 마련해줄 것이다. 강간 범죄와 관련된 수많은 현장에서 그는 강간과 성폭력을 둘러싼 모든 제도와 담론이 철저히 남성 중심적으로 편향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대중들의 시선 역시 남성권력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경험 위에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강간을 한 개인의 범죄 행위로 국한하기보다, 강간이라는 여성혐오적 범죄가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처리되는 전 과정을 문제 삼음으로써 남성연대라는 거미줄이 얼마나 촘촘하게 쳐져 있는지를 폭로한다. 나아가 남성이 독점한 강간 정의를 여성운동의 관점으로 끌어오는 데 주력하고, 강간 문화가 팽배한 현실에 여성들이 어떻게 개입해 싸워나갈 수 있는지를 타진하고자 한다. 피해 여성들에게 침묵을 강요하거나, 그들의 말을 거짓 증언으로 매도하는 오랜 불신의 늪에서 벗어나, 여성들이 점차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는 이 시점에 절실한 책이 아닐 수 없다.

태초에 강간이 있었다: 강간 문화의 뿌리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에 묶어두려고 의식적으로 협박하는 과정이 바로 강간이다.”

무엇보다도 브라운밀러는 이 책을 통해 강간이라는 범죄 행위를 역사화하려고 했다. 강간에 대한 기본 전제들을 의심한다는 것은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남성-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여성이라는 해묵은 구도 자체를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이런 관념이 존재해왔고, 그런 전제에 기초해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이 지금껏 끊임없이 시도되어왔기 때문이다. 이 유구한 관념은 여성을 남성이 소유한 재산 즉 사물로 보는 관점과 맥을 같이 하며, 사실은 결혼이라는 부부 관계 계약의 초기 형태 역시 여기서 비롯되었다.
브라운밀러는 타고난 신체적 구조(삽입당할 수 있는 구조)로 언제든 남성에게 강간당할 수 있다는 공포야말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게 만든 최초의 원인이라고 본다. 강간이야말로 역사적으로 여성이 어떻게 의존적 존재가 되었고, 보호를 대가로 한 짝짓기에 의해 가축화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강제로 납치해서 강간하는 행위가 제도화된 것이 곧 결혼이었으며, 남성들 간에는 여성을 약탈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지곤 했다. 그렇게 해서 여성은 남성에게 최초의 영구적 취득물이자 첫 번째 부동산이 되었다. 소유권 개념을 비롯해 사유재산 개념 역시 이 초기의 ‘여성 종속’에 기원을 두고 있다. 남성이 강제로 자신의 영역에 배우자를 귀속시키고 후에 자손까지 귀속시킨 것이 소유권 개념의 시초이다. 계급 억압 이론을 발전시키고 ‘착취’ 같은 단어를 이끌어낸 마르크스 같은 대가조차 경제구조에 내재된 강간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이런 관념은 사회적으로 ‘강간 문화’라는 위험한 토양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강간을 각종 선전선동에 활용하는 행태, 여성의 신체를 한낱 쾌락거리로 소비할 권리가 남성들에게 충분히 있고, 그것이 시민의 마땅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리버럴한 신념, 강간당한 여성에게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냐며 따져 묻는 제도와 행정 절차, 문란하게 행동해서 당했다며(소위 ‘그럴 만하다며’) 피해자의 과거 성 편력까지 들추려는 사법 시스템, 무엇보다도 여성 스스로가 주의해야 한다며 여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사회적 담론,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게 돕는 교육의 부재, 아름다운 피해자에게만 집중하는 언론 등 이 모든 것이 철저히 남성권력이 주도하는 강간 문화에 불을 지피고 있는 셈이다.

전쟁과 혁명: 역사 아래 묻힌 여성들의 진실

“이것이 나의 무기, 이것이 나의 총
업무용 물건이자, 유흥용 물건이지”

여성을 남성이 소유하는 재산으로 취급함으로써 강간이라는 범죄를 일종의 절도죄로 여겼던 관행은 그야말로 강간을 강간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었던 여성들의 비극을 상기한다. 법이 발전하면서 이런 관행은 사라졌지만, 남성들이 그들만의 관점으로 강간 사건을 멋대로 휘두르고 때론 조작하기까지 하는 일은 새로운 형식으로 계속해서 발명되어왔다. 강간을 선전선동 수단으로 동원해 남성 집단의 승리/패배를 정당화하려는 행위들은 국가, 인종 간 벌어지는 각종 전쟁 또는 혁명에서 끊임없이 시도되는 중이다. 이것은 여성들의 존재 자체를 지우고 역사를 오로지 남성들만의 것으로 전유한다는 점에서도 상당히 문제적이며, 남성연대가 휘두르는 폭력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전시 강간을 기록하는 일은 여태껏 진지한 탐구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전시 강간을 다루는 이 책의 3장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밝힌 브라운밀러의 언급은 자부심 그 이상의 감정을 드러낸다. 저자는 전쟁의 역사를 전시 강간 혹은 강간 프로파간다의 역사로 재구성함으로써 승패 아래 묻힌 여성들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했다. 브라운밀러가 보기에 전쟁은 그 본질 자체가 ‘여성에 대한 멸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쟁과 군대의 이데올로기, 즉 군대에서 남성들이 독점하는 무기와 그것이 발휘하는 잔혹한 힘, 병사들 간의 결속, 명령 체계에 복종하는 남성적 훈육 과정 따위는 여성을 멸시하는 태도에 기반을 둔다. 여성은 중요한 세계와는 관련이 없고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수동적으로 구경만 하는 존재라는 식의 폄하.
군대가 보증하는 남성 중심적 가치 체계와 그 안에서 싹트는 남성연대는 여성을 주변적 존재로 배제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여기에 좀 더 역사적 좌표를 부여해보면, 전시 강간은 여성을 순전히 소유물로만 취급했던 옛 방식이 세월이 흘러 훨씬 더 교묘한 가치 체계로 발전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패전국의 여성을 강간하는 일이 승리를 북돋는 행위이자 군인의 남성다움과 성공을 증명하는 증표라도 되는 듯, 여성의 몸에 접근하는 기회를 전쟁에서 주어지는 보상으로 이용하는 체계가 자라나온 것이다.
하지만 브라운밀러는 이것이 단순히 승전국이 휘두른 폭력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강간에 관련된 한,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좌든 우든, 혁명 세력이든 반동 세력이든, 식민국이든 피식민국이든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지적이다. 역사의 심판을 통해 구원을 받은 어떤 세력도 결코 강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제 1, 2차 세계대전은 의심의 여지없이 강간을 선전선동의 도구로 활용했으며, 심지어는 선전선동에서 강간이 지니는 가치를 주제로 쓰인 책도 있다. 1차 대전 당시 연합국 측은 국제 여론에서 독일군을 낙인 찍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강간을 내세웠는데, 이는 강간을 당한 여성들의 고통을 헤아리려는 것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자극적이고 외설적인 방식으로 ‘강간 이야기’를 꾸며내기에 이른다. 강간의 도가니였다고밖에 할 수 없는 2차 대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후 열린 전범 재판에서는 상대편에 대한 군사적 응징과 보복의 수단으로 강간을 이용하는 풍경이 나타난다.
전쟁만이 아니다. 인종주의적이거나 정치적인 함의를 띤 봉기, 폭동, 혁명과 소규모 분쟁은 언제나 남성이 강간 욕망을 배출할 기회를 부여해왔다. 나아가 그런 역사적 사건들은 남성들의 강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까지 제공해준다. 이때도 역시나, 강간 사례들은 선전선동에 이용될 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증언’의 형태로 보존된다.

강간과 성폭력, 권력을 쥔 자가 휘두르는 무기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삼은 강간과 성폭력이 이렇듯 유구한 역사를 통해 오늘날까지 반복되어왔다면, 도대체 그것을 가능케 한 동력은 무엇일까? 남성들은 여성에게 왜 이러한 범죄를 저질러온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로 브라운밀러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성기 구조가 다르다는, 즉 남성이 삽입을 하게 되고 그때 여성은 삽입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인 측면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 못한다. 적군의 여성에게 강간 이상의 불필요한 잔혹행위까지 일삼은 전시 군인들의 수많은 예화가 보여주듯, 강간이라는 폭력은 근본적으로 섹스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강간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에서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모욕행위를 저지르는 여러 강간범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강간은 일부 남성들이 정욕을 통제하지 못해 저지르는 범죄가 아니라,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약하고 자기방어 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여성들을 정확히 목표로 삼아 저지르는 권력 범죄이다. 전쟁 혹은 혁명 후의 기념식에서 마치 여성이 혐오스러운 적군/압제자의 상징이라도 되는 듯 선택되어 강간당하는 이유는 그저 여성들이 손쉽고도 준비된 표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간은 단순히 힘을 행사하는 행위만이 아니며, ‘남성이 권력의 우위를 이용해 여성의 신체 내밀한 곳에 동의 없이 침입하는 행위’이다. 2018년 한국에서 발생한 검찰 내부 성폭력 사건과 2016년의 ‘#??계_내_성폭력 운동’의 수많은 폭로들이 가리키듯, 가해자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제도적 환경을 이용해 피해자에게 접근하곤 한다. 가해자 대다수는 특정 집단/계 내에서 존경받는 우상으로 ‘압도적인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로서는 단호히 저항할 수 없는 데다,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조차 거의 얻지 못한다.
피해 여성의 곤경은 성폭력을 당하는 것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성이 성폭력범을 정식으로 고소한다고 하더라도, 법정은 범죄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는다. 강간 피해자를 ‘분위기에 휩쓸린 바보’로 보는 관점이 법정에서 검사와 배심원들을 지배하고 있고, 그런 관점에 기초해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는지, 다시 말해 여성 스스로도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를 집요하게 의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여성이 이전에도 법정에 선 이력이 있거나 과거 성 편력이 화려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더욱 더 정당성을 인정받기 힘들어진다. 반면, 바보 같은 피해자를 무장해제시킨 강간범의 매력과 인기는 그가 피고석에 설 때에도 방패로 작용한다. 비단 권위자에 의한 성폭력뿐 아니라, 감옥 내에서 이루어지는 강간(상대적으로 약한 남성을 ‘감옥 여자’로 만들어 강간하는 행위), 아동 강간, 경찰에 의한 강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우월한 위치 혹은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 상대방의 굴복을 보다 수월하게 이끌어내는 것이다.

‘강간 영웅’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더욱 문제적인 것은 강간이 영웅적 행위로서 남자다운 것으로 용인될 수 있다는 발상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퍼져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이 남성연대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발상이다.
강간하는 남성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경향은 강간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하며, 현실 세계를 비롯해 문학과 대중문화 텍스트,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중이다. 다수의 원시 부족에게서 발견되는 여성을 납치, 강간해 부인으로 삼는 관행부터가 그러한데, 여기서 여성의 의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남성들끼리 싸워서 이기는 자가 여성을 취하면 그만이다. 이렇듯 전투를 통해 여성을 쟁취하고 길들이는 행위가 남성의 진정한 역할로 설정되고, 그것을 수행하는 남성에게는 영웅의 지위가 부여된다. 진짜 남자다움이란 여성을 정복하는 행위라는 듯이. 이런 것들이 너무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진다면, 문화 영역에서 나타나는 비교적 최근의 흐름에도 얼마든 주목해볼 수 있다.
문화를 정의하고 지배하는 남성들의 공적, 사적 환상을 들여다보면 ‘강간 영웅 신화’가 전혀 다를 바 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신화는 생각보다 많은 문화 텍스트의 근간을 이룬다. 하드코어 포르노그래피는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책과 영화, 노래들도 여성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남성들을 찬미한다. 영국의 추리작가 이언 플레밍이 창조한 전설적 첩보원 제임스 본드가 적과 싸워 이길 때마다 여자를 획득하는 것, 보스턴 교살자로 불리는 잔혹한 강간살인범 앨버트 드살보의 강간살해 장면을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롤링스톤스의 여러 히트곡(<한밤의 소요자> <만족> <피 흘리게 놔둬>), 앤서니 버지스의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와 이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스탠리 큐브릭의 동명 영화가 강간을 미화하는 방식, 강간범을 옹호하고 미화하는 할리우드 유명 감독들의 작품 등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이처럼 다양한 경로로 강간 영웅 모델이 재현되고 있는 현실은, 우리는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은연중에 강간 영웅 서사에 대한 대중들의 엄청난 수요와 열망이 존재한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런 대중문화 속에서 숨쉬고 있으며, 그것을 흡수하는 것은 물론 거기에 기여하기까지 한다. 현실의 강간범과 그들을 모델로 한 갖가지 서사들은 대중들이 강간범을 다름 아닌 무척 신비로운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강간범이 통제할 수 없는 성욕에 사로잡힌 초인으로 여겨지거나, 지배 사회에서 일탈해 저항하는 영웅의 후광을 부여받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브라운밀러가 지적하듯 실제 경찰 파일에 기록된 강간범들이란 지극히 따분하고 평범한 존재일 뿐이다.
말하자면 강간은 어떤 점에서 남자만 출입 가능한 간부 식당이나 남자들끼리 모여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남성성과 권력을 집단적으로 강화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단지 어떤 남성들에게는 간부 식당에 출입하거나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일보다 강간이 훨씬 더 접근하기 쉬운 선택지일 뿐. 그러나 생각해보자. 실제로 강간을 저질러 손을 더럽히는 자는 이 강간범들이지만, 이들이 단세포 짐승이 되어 가져다주는 그 혜택을 받는 쪽은 이들보다 계급과 지위가 우월한 자들이다.

여성이 강간을 원한다고?

“여성도 강간을 원한다는 믿음은 상대를 신경 쓰지 않는 오만한 무신경함 그 이상이다. 이는 여성도 강간을 원할 만큼 남성권력이 여성의 정신을 장악했다고 믿어 마지않는 것이다.”

여성을 강간하는 행위를 영웅적 공적으로 여기는 발상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여성들이 ‘사실은’ 강간을 원한다는 식의 사고이다. 이런 생각은 일반 대중들은 물론 법과 제도 전반에 여성들에 대한 불신의 형태로 뿌리를 내렸다.
“모든 여성은 강간당하기를 원한다”를 비롯해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강간당하는 여성은 있을 수 없다” “그녀가 원했다” “어차피 강간당할 상황이면 긴장을 풀고 즐기는 편이 낫다”와 같은 터무니없는 언사들은 남성이 강간에 대해 갖고 있는 지독한 신화이자, 여성의 섹슈얼리티마저 지배하는 왜곡된 격언이다. 여기서 진짜 문제는 이런 신화를 믿는 게 남성들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남성연대와 남성권력의 오랜 세뇌는 여성들까지 이 신화에 가둬버렸다. 실제로 남성권력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여성에게 자신들의 이 신화를 납득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여성들이 분노해야 할 현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사실 모든 여성이 강간당하기를 원한다는 말과 자기 의지에 반해 강간당하는 여성은 없다는 말은 동일한 주장을 품고 있다. 즉, 여성이 확실하게 의사 표시를 하거나, 강간 위협이 닥친 상황에서 민첩하게 굴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발상은 어디선가 강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소름끼칠 만큼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해왔다. 하지만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이 모든 것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한국만 해도 한 해 정식으로 구속되는 강간 건수만 400~500건인 데다 데이트폭력에서 사망하는 여성이 50명 정도에 이르는 현실인데, ‘스스로 충분히 조심하면 화를 입지 않는다’는 조언 아닌 조언은 얼토당토않다. 게다가 가해자가 여럿인 윤간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저항은 아무런 효력도 낼 수 없다. 이에 더해 강간당할 상황에서는 차라리 즐기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는 피해자가 당하는 모욕을 깎아내리며 저항 의지마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오만함을 드러낸다.
결국 ‘여성이 원했다’는 발상에 기초한 위의 발언들은 모두 강간범이 스스로 져야 할 비난의 짐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고전적인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 더 큰 맥락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강간의 책임을 공연히 여성들에게 떠넘기는 남성사회의 폭력 자체다. 절망스럽게도 여성들이 맞서 싸워야 할 문제는 이런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런 발상들이 또다시 남성 중심적으로 조직된 법과 제도에까지 스며들어 있어서, 여성들은 법정에서도 자신이 얼마나 의사를 정확히 밝혔는지, 해당 남성에게 어떤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았는지, 격렬히 저항을 했는지 등을 통해 자신이 결코 강간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해내도록 강요받는다. 원치 않는 범죄를 당한 피해자임에도, 도대체 왜 여성만이 이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할까? 강도 사건의 피해자에게는 그 누구도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했는지를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정말 납득하기 힘든 처사이다. 마치 그 옛날 ‘보디발의 부인’ 이야기에서처럼 원한을 품은 여성이 무고한 남성에게 거짓으로 죄를 씌우고 그의 앞길을 망치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렇게 남성들은 언제나 여성이 거짓말을 한다고 외쳐왔다.

여성들이여, 반격하라!

여성운동은 어떤 부분에서 이미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강간을 수치스러워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드러내 말할 수 있는 범죄로 만든 것 자체가 하나의 성취이다. 여성들이 모여 강간에 대해 말하는 자리가 처음 생겼을 때만 해도 세상은 코웃음을 쳤다. 성범죄는 그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것이라는 브라운밀러의 외침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마저 의구심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계속해서 말하고 싸웠고, 그 싸움은 세계 각지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강간에 관한 수많은 논의 끝에 브라운밀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 ‘반격’이다. 남성적 가치관에 따라 주조된 말도 안 되는 억제책이나 조언을 거부하고, 직접 나서서 싸우는 여성이 되자는 것이다. 싸우는 여성이 되자는 말은 결코 나이브하지 않은데, 이것이 그 자체로 여태껏 남성 중심 사회가 강요해온 여성 상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말은 실제로 ‘싸울 수 있는 신체 능력’을 기르자는 하나의 제언이기도 하다. 신체적 폭력을 직면했을 때, 대부분의 여성이 완전히 무너져 의지가 마비되는 고통을 겪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기보다 훈련된 결과이다. 여성들은 위기 상황에서 항상 울고, 좋은 말로 달래고, 빌고, 남성 보호자를 찾도록 길들여졌을 뿐 단 한 번도 싸우거나 이기도록 훈련받은 적이 없다. 태초부터 사회가 싸우는 여성을 금기시하고 억압해왔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강간 자체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싸우지 않고 남성의 말에 복종하는, 남성의 환상이 멋대로 만들어낸 그런 ‘예쁜 수동성’이다. 바로 이것이 여성들을 강간의 두려움에 더 단단히 묶어두고 고립시킨다. 결국 이 책은 강간에 관한 책인 동시에, ‘싸우는 여성’ 그리고 앞으로 ‘싸울 여성’들을 위한 책이다.

저자 : 수전 브라운밀러
1935년 브루클린의 유대인 중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포그롬 및 홀로코스트로 유대인이 학살당해온 역사를 배운 것이 후일 인종차별과 성폭력 같은 약자 집단에게 쏟아지는 집단적 폭력에 맞서는 운동가가 된 계기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52년 코넬대학교에 진학했지만, 2년 만에 중퇴하고 잠시 브로드웨이에서 배우 지망생으로 지내기도 했다. 이 책에 나오듯 ‘고백 잡지’ 편집자로 저널리스트 경력을 시작해 1960년대에는 《뉴스위크》와 NBC TV 등 유수의 잡지와 방송에서 기사 작성자로 활동했다. 1964년 여름 미국 남부 미시시피로 가서 흑인의 실질적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한 ‘유권자 등록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8년부터는 ‘뉴욕 급진 페미니스트’의 일원으로서 활동했으며, 1975년에 나온 이 책은 이런 그의 인생 궤적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저서로 《셜리 치점 전기Shirley Chisholm: A Biography》(1970), 《여성성Femininity》(1984), 가정폭력 및 아동 살해 사건 실화에 기초한 소설 《웨이벌리 플레이스Waverly Place》(1989), 《베트남 여행기Seeing Vietnam: Encounters of the Road and Heart》(1994), 《우리 시대에는: 혁명 회고록In Our Time: Memoir of a Revolution》(1990), 《뉴욕 꼭대기의 내 정원My City High Rise Garden》(2017) 등이 있다.

역자 : 박소영
2003~2008년 《여/성이론》 편집위원. 페미니즘 관점에서 생명과학기술과 일상의 정치를 살펴본 책인 《프랑켄슈타인의 일상: 생명공학시대의 건강과 의료》(2008)를 번역 및 편저했다. 성적 계급으로서 여성이 해방되려면 재생산 수단인 여성 자신의 몸과 재생산 기술 및 제도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여성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래디컬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주장을 화두 삼아, 양육 제도, 재생산 기술, 재생산 능력을 가진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 중 하나로서 젠더폭력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읽고 쓰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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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이 책을 쓰기까지 4
서문 12

1. 강간의 대중심리 19
강간을 정치적으로 분석하기 20
남성연대와 강간 24

2. 태초에 법이 있었다 27
성경 속 강간 이야기 32
강간과 결혼 그리고 재산 39

3. 전쟁과 강간 51
제1차 세계대전 66
제2차 세계대전 78
방글라데시 123
베트남전쟁 134

4. 폭동, 포그롬 그리고 혁명 173
미국 독립혁명 175
포그롬 184
모르몬 박해 190
흑인을 대상으로 삼은 폭도 폭력: KKK 192
백인을 대상으로 삼은 폭도 폭력: 콩고 201

5. 미국 역사에 관한 두 가지 연구: 인디언과 노예제 215
인디언 216
노예제 236
부록: 전문가들의 오류 261

6. 통계로 본 강간범: 신화에서 과학으로 267
짝패와 집단, 패거리 286
과시적인 성적 모독 행위 297
강간살인 301

7. 인종 문제 321
강간은 정치 범죄다 322
인종 간 강간과 인종차별적 판결 327
노예제 남부의 강간 콤플렉스 332
린치와 강간 342
스코츠버러 사건 352
인종 간 강간 사건과 미국의 진보 운동 360
윌리 맥기 사건 367
에멧 틸 사건 377
정치적 보복으로서 강간 381

8. 권력과 성폭력 393
감옥 강간: 동성 간 경험 396
경찰 강간 413
아동 성 학대 417

9. 강간 영웅 신화 435
여성 통제 수단으로서 강간 438
강간을 남자다운 행동으로 찬양하기 446
연쇄살인범 신화 450
강간 영웅의 실체 459
대중문화의 강간 미화 465
강간 신화의 말로: 농담처럼 무마하기 474

10. 여성이 강간을 원한다고? 479
강간 신화의 핵심 명제 484
프로이트주의의 강간 이데올로기 490
여성이 의식적으로 즐기는 강간 환상 502
성녀: 좋은 여자는 죽은 여자다 510
대중문화 속의 아름다운 피해자 518
“금발의 전직 쇼걸, 호텔 스위트룸에서 살해당하다” 523
여성 잡지: “그는 내가 그 짓을 하게 만들었어!” 531

11. 강간 말하기 541

12. 여성이 반격한다 587
법, 남성 중심적 관념의 산물 593
법 집행자 대다수가 남성인 현실 605
미디어의 반여성 선전선동 609
여성들의 첫 번째 반격 620
남성들의 충고는 필요 없다 622
반격! 이제 강간 이데올로기를 끝장내자 626

감사의 말 634
미주 639
옮긴이의 말 673
찾아보기 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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