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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23 13:25
제국주의론(1917년 9월)_레닌
 글쓴이 : webmaster
조회 : 2,920  

제국주의론

 

 

V.I. 레닌 지음

 

 

 

차 례

 

 

서문

 

불어판과 독일어판 서문 

1장 생산의 집적과 독점체

2장 은행과 그 새로운 역할

3장 금융자본과 금융과두제

4장 자본수출

5장 자본가단체들 간의 세계분할

6장 열강 간의 세계분할

7장 자본주의의 특수한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8장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패

9장 제국주의 비판

10장 제국주의의 역사적 위치

 

서문

 

 

지금 독자들에게 내놓는 이 팸플릿pamphlet1916년 봄에 취리히에서 쓴 것이다. 그곳에서만 작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프랑스어 및 영어 문헌의 부족, 특히 러시아어 문헌의 절대적인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제국주의에 관한 주요한 영어문헌인 홉슨J. A. Hobson의 저작을 매우 조심스럽게내가 보기에 이 책은 그렇게 다루어져야 한다이용할 수 있었다.

 

이 팸플릿은 차리즘tsarism의 검열을 의식하면서 쓴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작업을 단지 이론적인, 특히 경제적인 사실분석으로 엄격히 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측면에 대해 언급할 경우에도 극히 신중하게, 차리즘 하에서 혁명가가 합법적인저작을 쓰기 위해 펜을 들 때마다 의지해야 했던 암시나 비유적인 언어로저 저주스런 이솝식의 언어로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이 자유로운 시기에, 검열 때문에 바이스iron vice에 짓눌린 것처럼 뒤틀리고 비비꼬인 이 팸플릿의 문장들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제국주의가 사회주의혁명의 전야라는 사실, 사회배외주의social-chauvinism(말로는 사회주의, 행동으로는 배외주의)는 곧 사회주의에 대한 철저한 배신이며 부르주아지 측으로의 완전한 도피라는 사실, 노동계급운동 내의 이러한 분열은 제국주의의 객관적 조건과 긴밀히 얽혀 있다는 사실 등등에 대해 나는 노예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1914~17년간 내가 국외에서 썼던 논문들을 모아놓은 곧 출간될 새로운 판본을 참조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의 119~120페이지 부분은 주의를 요한다. 여기서 나는, 자본가와 자본가 편으로 도피한 사회배외주의자들(카우츠키는 이들에 대해 매우 일관성 없이 반대하고 있다)이 영토합병 문제에 대해 얼마나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사회배외주의자들이 자기나라 자본가에 의한 영토합병을 얼마나 뻔뻔스럽게 감싸주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검열을 통과할 수 있는 형태로 독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바로 일본을 예로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라면 쉽사리 일본을 러시아로, 조선을 핀란드, 폴란드, 쿠를란트, 우크라이나, 히바, 부하라, 에스토니아 및 기타 대러시아인이 아닌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바꾸어 놓고 생각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독자들이 근본적인 경제문제, 즉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에 관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 이 팸플릿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현대의 전쟁과 현대의 정치를 전혀 이해하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페트로그라드. 1917426.

 

 

불어판과 독일어판 서문

 

 

 

러시아어판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팸플릿은 1916년에 차리즘의 검열을 고려하면서 쓴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전문을 고쳐 쓸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 그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일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의 기본 목적은 모든 나라의 반박할 여지없는 부르주아 통계자료와 부르주아 학자들의 시인에 기초하여, 1차 세계 제국주의전쟁의 전야인 20세기 벽두의 세계 자본주의체제를 복합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었고, 이는 지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차리즘의 검열 하에서조차 합법적일 수 있었던 이 책자의 예를 통해, 최근 거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된 이후 아직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남아 있는 최소한도의 합법성조차, 이른바 세계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평화주의social-pacifist적 견해와 희망이 지니는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이용할 수 있으며 또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선진자본주의국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확신시켜 주는 데 있어서도 이 책자는 어느 정도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서문에서는 검열을 통과했던 이 책자에 추가되어야 할 극히 중요한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본문에서 증명되고 있는 바와 같이 1914~18년의 전쟁은 여기에 참여한 양 진영 모두에게 제국주의전쟁(즉 침략적·강도적·약탈적 전쟁)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세계분할을 위한 전쟁, 식민지와 금융자본의 세력권을 분할·재분할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참된 사회적 성격,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참된 계급적 성격이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증거는 전쟁의 외교사 속에서가 아니라 모든 교전국 지배계급의 객관적 처지에 대한 분석 속에서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객관적 처지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실례나 개별적 통계수치가 아닌(사회생활의 현장은 극도로 복잡하므로 특정한 실례나 개별적 통계수치를 임의로 추출하여 어떤 명제를 논증하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다), 반드시 모든 교전국 및 전 세계 경제생활의 토대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루어야만 한다.

 

1876년과 1914년의 세계분할(6) 1890년과 1913년의 세계 철도의 분할(7)을 서술하면서 내가 인용한 자료들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반박할 여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철도는 자본주의의 기간산업인 석탄업과 제철업의 총화이며, 세계무역 및 부르주아민주주의 문명의 발전을 나타내는 가장 뚜렷한 지표이다. 철도가 대규모 생산과 독점체monopolies, 신디케이트syndicates, 카르텔cartels, 트러스트trusts, 은행, 그리고 금융과두제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는 사실은 이 책의 처음 몇 장에 걸쳐 서술되어 있다. 철도망의 불균등한 분포 및 불균등한 발전은 그 자체로 세계적 규모에 있어서 현대 독점 자본주의monopolist capitalism의 축소판이다. 이는 동시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한, 그러한 경제체제에서 제국주의전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철도의 건설은 언뜻 보기에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며, 민주주의적이고, 문화적이고, 문명을 보급하는 사업인 것처럼 여겨진다. 적어도 자본주의적 노예제를 밝은 색채로 윤색함으로써 보수를 받고 있는 부르주아 교수들이나 쁘띠부르주아적 속물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수천 가닥의 연결망으로써 그러한 사업을 생산수단 일반의 사적 소유와 결합시켜 주는 자본주의적 끈은 철도 건설 사업을(식민지·반식민지의) 수억의 민중들, 문명국의 임금노예를 포함하여 종속국에 살고 있는 지구상의 절반 이상의 인구를 억압하는 도구로 전화시켰던 것이다.

 

소경영주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 자유경쟁, 민주주의 등 자본가와 그들의 신문이 노동자와 농민을 기만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모든 슬로건들은 이제 아득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이제 자본주의는 한 줌의 선진국이 지구상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식민지적으로 억압하고 금융적으로 교살하는 하나의 세계체제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전리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무장한 2-3명의 강력한 세계적 강도들(미국, 영국, 일본) 사이에서 분배되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전리품의 분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자신들의 전쟁 속으로 전 세계를 끌어들이고 있다.

 

 

 

군주제 국가 독일에 의해 강요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과, 뒤이어 민주공화국 미국과 프랑스 및 자유영국에 의해 강요된 훨씬 더 잔혹하고 비열한 베르사유 강화조약은, 스스로 평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윌슨주의를 찬미하고 제국주의 하에서 평화와 개량이 가능하다고 주장해 온, 제국주의에 고용된 날품팔이 문필가들과 쁘띠부르주아적 반동들의 정체를 폭로함으로써 인류에게 대단히 유익한 공헌을 한 셈이다.

 

영국 측과 독일 측 가운데 어느 쪽 금융약탈자 집단이 보다 많은 전리품 차지하느냐를 결정짓는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수천만 명의 사망자와 불구자, 그리고 이 두 개의 평화조약은 부르주아지에 의해 짓밟히고, 억압받고, 기만당하고, 우롱당해 온 수백 수천만 민중들을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각성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전쟁이 빚은 전반적인 폐허로부터 성장하고 있는 전 세계적인 혁명적 위기는 아무리 길고 험난한 도정들을 거칠지라도 결국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그 승리로 종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인터내셔널의 바젤선언, 전쟁 일반이 아니라(전쟁에는 혁명전쟁을 포함하여 여러 종류가 있다) 1914년에 발발한 바로 그 전쟁을 이미 1912년에 감지하고 있는 이 선언은 이제 제2인터내셔널 영웅들의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완전한 파산과 배신을 폭로하는 기념비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나는 이 선언을 이 판본의 부록으로 첨부하는 바 제2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이 이 선언에서 당시 눈앞에 임박해 있던 전쟁과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관련에 대해 명확하고 명백하게, 그리고 단정적으로 서술해야 할 부분들을 마치 도둑이 범행 장소를 피해가듯이 조심스럽게 피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독자들의 주의를 거듭 촉구하고자한다.

 

 

IV

 

이 팸플릿은 카우츠키주의, 즉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이론가인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부(오스트리아의 오토 바우어 일파, 영국의 램지 맥도날드 등, 프랑스의 알베르 토마 등) 및 많은 사회주의자, 개량주의자, 평화주의자, 부르주아민주주의자, 목사들에 의해 대표 되고 있는 이 국제적 사조를 비판하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 사조는 한편으로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와 부패의 산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전체적인 생활방식 상 부르주아적·민주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는 쁘띠부르주아이데올로기의 불가피한 귀결이다.

 

카우츠키 및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이런 식의 견해들은 바로 그 저술가 자신이 수십 년 동안 특히 사회주의적 기회주의자들(베른슈타인, 밀레랑, 하인드만, 곰퍼스 등)과 투쟁하면서 열렬히 옹호해 왔던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원칙들을 완전히 방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세계에 걸쳐 카우츠키의 추종자들이 지금 (2인터내셔널 또는 황색인터내셔널을 통하여) 극단적인 기회주의자들과,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한 부르주아 연립내각을 통하여) 각국 부르주아정부와 실제적 정치무대에서 연합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혁명운동 일반, 특히 공산주의운동은 카우츠키주의의 이론적 오류를 분석하고 폭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임을 자처하지는 않지만 카우츠키 일파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모순의 심각성과 그 모순이 야기하는 혁명적 위기의 불가피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 평화주의 및 일반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전 세계에 걸쳐 여전히 매우 광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점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조류와 투쟁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당의 의무이다. 프롤레타리아 당은 부르주아지에게 기만당하고 있는 소경영주와, 다소 쁘띠부르주아적인 생활조건에 젖어 있는 수백만 근로민중을 부르주아지로부터 되찾아야하기 때문이다.

 

 

V

 

8자본주의의 기생성parasitism과 부패decay에 대해서 몇 마디 언급해야겠다. 이미 이 책 본문에서 지적했듯이, 전에는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지금은 카우츠키의 전우이자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내의 부르주아적·개량주의적 정책의 주요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힐퍼딩Rudolf Hilferding은 이 문제에 있어서, 공공연한 평화주의자이자 개량주의자인 영국의 홉슨보다 한 걸음 후퇴하고 있다. 전체 노동계급운동의 국제적 분열은 이제 매우 명백하다(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지금 바로 이 두 가지 조류 사이에서 무장투쟁과 내전이 격화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즉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에 대항하여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콜차크와 데니킨을 지지하고 있으며, 독일에서는 스파르타쿠스단에 대항하여 샤이데만 일파와 노스케파가 부르주아지에 협력하고 있다. 핀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사적 현상의 경제적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최고highest의 역사적 발전단계, 즉 제국주의의 특징인 자본주의의 기생과 부후에 있다. 이 팸플릿에서 증명되고 있듯이 자본주의는 오늘날 한 줌의(세계인구의 1/10도 되지 않는, 아무리 관대하게계산하더라도 1/5이 채 되지 않는) 예외적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들을 탄생시켰고 이들 국가는 단지 이자쿠폰 오리기clipping coupons’만으로 전 세계를 약탈하고 있다. 전쟁 전의 부르주아 통계에 의하면 이들은 자본수출을 통해 전쟁 전가격으로 해마다 80~100억 프랑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물론 지금 그 액수는 훨씬 더 많다.

 

이러한 거대한 초과이윤(이 이윤은 자본가들이 자국의노동자들로부터 착취하고 있는 이윤이상으로 획득하는 것이므로 초과이윤이다) 중 일부를 사용하여 노동자 지도부와 노동귀족 상층부를 매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선진국 자본가는 실제로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 즉 그들은 직접·간접으로, 또 공개·비공개로 그들을 매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르주아지화한 노동자층 혹은 노동귀족층은 매우 속물적인 생활양식, 소득규모,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2인터내셔널의 주요한 지주支柱이자 오늘날에는 부르주아지의 주요한 사회적(군사적은 아니지만) 지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계급운동에 있어서 부르주아지의 실질적 하수인이자 자본가계급의 노동 관리인이며, 개량주의와 배외주의의 실질적인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내전에서 필연적으로, 그리고 적지 않은 수가 부르주아지의 편에 가세하며, ‘코뮌 파에 대향하여 베르사유 파에 참여한다.

 

이러한 현상의 경제적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공산주의운동 및 임박한 사회혁명의 실천적 임무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제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의 전야이다. 이 점은 1917년 이래 전 세계적 차원에서 입증되었다.

 

192076

 

N. 레닌

 

 

 

 

지난 15~20년간, 특히 미국스페인전쟁(1898)과 보어전쟁(1899~1902) 이후, 구세계와 신세계의 경제문헌이나 정치문헌에서는 현 시대의 특징을 제국주의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1902년에는 영국의 경제학자 홉슨의 저서 제국주의론(lmperialism)이 런던과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이 저서는, 과거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칼 카우츠키의 현재 관점과 본질적으로 같은 부르주아사회개량주의와 평화주의의 관점을 취하고는 있지만, 제국주의의 경제적·정치적 주요 특질을 매우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1910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루돌프 힐퍼딩의 저서 금융자본론(Finance Capital)이 빈에서 출판되었다. 이 저서는 화폐이론에 대한 오류 및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와 나름대로 화해시키려는 일정한 경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발전의 최근latest 국면이것은 그 책의 부제이기하다에 관한 매우 귀중한 이론적 분석을 담고 있다. 최근 수년간 막대한 양의 잡지와 신문논설에서, 그리고 1912년 가을에 열린 켐니츠와 바젤 대회에서 채택한 결의에서 제국주의에 관해 서술된 것은 사실상 위 두 사람의 저자들이 설명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요약한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제국주의의 주요한 경제적 특질의 연관과 상호관계를 가능한 한 평이한 형태로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제국주의의 비경제적 측면도 물론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못할 것이다. ‘모든 독자에게 흥미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근거 문헌이나 주석은 권말에 싣기로 한다.

 

 

1장 생산의 집적concentration과 독점체monopolies

 

 

 

산업이 엄청나게 성장하고 점점 대규모화되는 기업으로 생산이 급속히 접적되는 과정은 자본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질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의 생산조사는 이 과정에 대해 완벽하고도 정확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1,000개의 기업 중 5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대기업의 숫자는 1882년에 3, 1895년에 6, 1907년에 9개꼴로 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 100명 중 이러한 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 수도 각각 22, 30, 37명꼴로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대기업에서의 노동은 훨씬 더 생산적이기 때문에, 생산의 접적은 노동자의 접적보다 훨씬 더 두드러진다. 증기기관과 전동기에 관한 자료를 볼 때 이 점은 분명히 나타난다. 독일의 경우, 상업·운송업 등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의 산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대기업은 총 기업 수 3265,623개 가운데 3588개로서 그 비율은 겨우 0.9%이다. 그런데 이들 기업은 총 노동자 1,440만 명 가운데 570만 명, 39.4%를 고용하고 있으며, 증기력에서도 총 830만 마력 가운데 660만 마력, 75.3%, 전력에서도 총 150kw 가운데 120kw, 77.2% 사용하고 있다.

 

총 숫자의 1/100도 안 되는 기업들이 증기력과 전력 총량의 3/4 이상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총 기업수의 91%를 차지하는(노동자 5명 이하를 고용하는) 297만 개의 소기업들은 증기력과 전력총량의 겨우 7%만을 이용하고 있다! 수만 개의 대기업에 비해 수백만 개의 소기업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907년 독일에서 천 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은 586개가 있었다. 이들 기업은 총 노동자수의 거의 1/10(138만 명)을 고용하고, 증기력과 전력 총량의 거의 1/3(32%)을 소비했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화폐자본과 은행은 한 줌밖에 안 되는 대기업의 이러한 우위를 한층 더, 문자 그대로 압도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이에 따라 수백만의 중소 경영주proprietor’들은 물론 일부 대경영주조차도 수백 명의 백만장자 금융업자들에게 사실상 완전히 예속되어 버렸다.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선진국인 미국에서 생산의 집적은 더욱 크게 성장했다. 미국의 통계는 좁은 의미의 산업으로부터 추출한 것으로서, 연간 산출량의 가치에 따라 기업을 분류하고 있다. 1904년에 l백만 달러 이상을 산출한 대기업은 1,900(총 기업 수 216,180개의 0.9%)였다. 또 이 기업들에 고용된 노동자는 140만 명(총 노동자수 550만 명의 25.6%)이었고, 산출액은 56억 달러(총 산출액 148억 달러의 38%)에 달했다. 그런데 5년 후인 1909년에는 3,060개의 기업(268,491개의 1.1%)200만 명의 노동자(660만 명의 30.5%)를 고용하여 90억 달러(207억 달러의 43.8%)의 산출액을 올렸다.

 

전국 기업 총 생산의 거의 절반이 1/100밖에 되지 않는 기업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 3,000개의 거대기업은 258개 산업부문에 걸쳐 있다. 이 사실로부터 접적이 어느 정도의 발전단계에 이르면 그 자체로 곧장 독점monopoly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수십 개 정도의 거대기업은 쉽사리 협정을 맺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규모가 크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경쟁이 곤란해지고 독점으로의 경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독점으로의 이러한 전화transformation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중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지라도이다. 그러므로 이 현상은 특히 상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오해하기 쉬운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250개의 산업부문에 3,000개의 거대기업이 존재하므로 자칫하면 마치 각 부분마다 12개씩의 대기업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산업부문에 대기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최고의 발전단계에 달한 자본주의의 대단히 중요한 특질은 소위 기업합동’, 즉 각기 다른 산업부문이 하나의 기업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료 가공의 연속적 단계에 의한(예를 들면 철광석으로부터 선철, 선철로부터 강철, 또 이 강철로부터 여러 가지 완성품을 제조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각 부문이 상호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예를 들면 폐물 또는 부산물을 가공하거나 포장 재료를 생산하는) 관계에 있는 경우도 있다.

 

힐퍼딩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업합동은 경기의 부침을 완화함으로써 합동기업의 안정된 이윤율을 보장한다. 둘째로 기업합동은 교역을 배제시킨다. 셋째로 그것은 기술적 진보를 가능하게하며, 따라서 순수한’[· 비합동] 기업이 얻는 이윤 이상의 초과이윤을 획득하게 한다. 넷째로 그것은 순수한기업에 대해 합동기업의 위치를 강화시켜 주며, 원료가격의 하락이 제품가격의 하락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심각한 불황기에 합동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켜 준다.”

 

 

독일 철공업에 있어서 혼합기업, 즉 합동기업에 대한 책을 쓴 바 있는 독일의 부르주아 경제학자 하이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순수기업은 높은 원료가격과 낮은 제품가격 사이에서 압살되어 파멸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갈은 상황을 볼 수 있다.

 

 

한편에는 연간 수백만 톤을 생산하는 대석탄회사들이 석탄산디케이트로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이들 회사와의 밀접한 관계 하에서 대제철소들이 철강신디케이트로 조직되어 있다. 연간 4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고, 엄청난 양의 광물과 석탄을 채굴하며, 철강제품을 생산하고, 회사 사택에 l만 명의 노동자를 거주시키고 있으며, 때로는 철도나 항만까지 소유하고 있는 이들 거대기업이야말로 오늘날 독일 철강회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려하여 집적은 점점 더 진전되며, 개별 기업은 더욱 대규모화한다. 하나 혹은 몇 개의 산업부문에서 계속 증가하는 기업들은 베를린 6대은행의 지원과 지도하에 거대기업으로 결합된다. 독일 광산업에 있어서 접적에 관한 칼 마르크스의 가르침이 올바르다는 것은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관세와 운임율에 의해 산업이 보호되고 있는 한 나라에서 마르크스의 학설은 분명히 적용되고 있다. 독일 광산업은 이제 수탈에 나설 만큼 충분히 성숙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심적인 한 부르주아 경제학자가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결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독일산업이 높은 관세로 보호받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하이만이 독일을 그렇게 특수한 범주로 묶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상 독일의 그러한 조건은 집적과 독점적 제조업자의 단체, 카르텔, 신디케이트 등등의 형성을 단자 촉진시켰을 뿐이다. 자유무역국인 영국에서도 집적은 다소 완만하거나 때로는 다른 모습을 취할 뿐 역시 독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헤르만 레비교수는 독점, 카르텔 및 트러스트라는 제하의 특별 연구에서 영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자료를 기초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영국에서는 기업의 커다란 규모와 높은 기술수준이 독점으로의 경향을 품고 있다. 한편으로는, 집적의 결과로 기업 당 자본투자량이 커지고, 이 때문에 새로운 기업을 창설하기 위해 요구되는 자본 규모도 증대되며, 따라서 새로운 기업의 창설이 더욱 더 어려워진다. 다른 한편으로는(이 점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집적에 의해 형성된 거대기업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모든 새로운 기업은 막대한 양의 잉여생산물을 생산할 것인 바, 이 생산물을 유리하게 팔기 위해서는 수요가 엄청나게 증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 경우, 이 잉여생산물로 인해 새로운 기업이나 가존의 독점체가 수지를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상품가격이 하락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호관세로 인해 카르텔 형성이 용이한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대개의 경우 경쟁하는 주요 기업의 수가 ‘20여 개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독점적 제조업자의 단체, 카르텔, 트러스트가 발생한다. “여기에서는 전체 산업부문에 걸쳐 집적이 대산업 독점체의 형성에 대해 미치는 영향이 극히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반세기 전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썼을 때, 자유경쟁은 압도적 다수의 경제학자들에게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졌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이론적·역사적으로 분석하면서 자유경쟁은 생산의 집적을 낳고 생산의 집적은 그 발전의 일정단계에서 독점에 이른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관변학은 이 마르크스의 저서를 묵계로써 매장해 버리려 했다. 그러나 이제 독점은 사실이 되었다. 경제학자들은 독점의 다양한 현상을 서술하는 책들을 산더미같이 써 내고 있으면서도 줄곧 입을 모아 마르크스주의는 논파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 속담에도 있듯이 사실이란 고집스러운 것이며, 좋든 싫든 그것을 고려해 넣어야만 한다. 사실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보호무역이냐 자유무역이냐라는 개개 자본주의국들 간의 차이는 독점의 형태 또는 발생 시기에 있어서 중요치 않은 변화를 낳을 뿐이며, 생산의 집적에 의해 독점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현 발전단계의 일반적·근본적 법칙인 것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낡은 자본주의를 명확하게 대체한 시기를 매우 정확히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은 곧 20세기 초이다. ‘독점체 형성의 역사에 관한 최근의 노작 가운데 하나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자본주의적 독점의 단편적인 예는 1860년 이전의 시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서 오늘날 그토록 일반화되어 있는 형태의 맹아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카르텔의 전사前史를 표현할 뿐이다. 현대 독점의 참된 출발은 가장 이르게 잡아도 1860년대가 되어서야 나타난다. 그리고 독점이 급속하게 성장하는 최초의 중요한 시기는 1870년대의 국제적 산업 불황과 함께 시작하여 1890년대 초까지 계속된다.”

 

문제를 유럽에 한정시켜 고찰한다면 자유경쟁은 60년대와 70년대에 정점에 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무렵 영국은 낡은 형태의 자본주의적 조직을 완성했고, 독일에서는 이 조직이 수공업 및 가내공업과 치열하게 투쟁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형태를 창출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변혁은 1873년의 공황,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에 뒤이은 불황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불황은 80년대 초에 거의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잠깐 중단되었던 시기와 1889년경의 예외적으로 강력하기는 했으나 단기간으로 끝난 호황기를 제외하고는 22년에 걸쳐 유럽의 경제사를 장식하고 있다.” “1889~90년의 짧은 호황기 동안, 이 경기에 편승하기 위하여 카르텔체계가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무분별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물가는 카르텔이 존재하지 않았을 경우보다도 훨씬 빨리, 그리고 엄청나게 치솟았다. 이로 인해 이들 카르텔은 거의 모두가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그 후 다시 5년간에 걸쳐 불경기와 물가하락이 계속되었지만 산업계에는 새로운 분위기가 지배하게 되었다. , 불경기를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고, 새로운 호황기 전의 중간휴식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카르텔 운동은 제2기에 접어들었다. 카르텔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경제생활의 기초 중의 하나가 되었다. 카르텔은 모든 산업부문을 차례차례로 정복해 나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먼저 원료산업을 정복하고 있다. 이미 1890년대 초에 카르텔은 코우크스신디케이트를 조직하고 그 이후 이를 모델로 하여 석탄신디케이트를 조직함으로써 카르텔의 기술을 만들어 냈는데, 이 결합 기술의 수준은 오늘날에도 거의 달라진 바 없다. 19세기 말의 상당한 호경기와 1900~03년의 공황은 완전히적어도 광산업과 철강업에서는카르텔의 보호 아래 겪게 되었던 최초의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 일이 무언가 신기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지금의 일반적언 의식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경제생활 영역이 이제 자유경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

 

 

이상과 같은 독점체 역사의 주요 단계를 총괄하면 다음과 같다.

 

(1)1860-70년대 : 자유경쟁의 발전이 절정에 달한 최고highest의 단계. 독점은 거의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의 맹아의 단계. (2)1873년 공황crisis 이후 : 카르텔은 상당히 발전했지만 아직 예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직 지속성을 갖추지 못한 일시적인 현상이다. (3)19세기 말의 호황boom에서 1900~03년의 공황까지의 시기 : 카르텔은 경제생활 전반의 토대가 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전화되었다.

 

카르텔은 판매조건, 지불기한 등등에 관한 협정을 맺는다. 카르텔은 자가들끼리 시장을 분할하고, 생산물의 양과 가격을 결정하며, 여러 가업들에게 이윤을 분배한다.

 

독일의 경우 카르텔의 수자는 1896년에 약 250개였고 1905년에는 385개로 대략 12천 개의 기업이 참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수자가 과소평가된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위에서 인용한 1907년도 독일 산업통계의 수치가 명백히 보여주듯이, 12천 개의 대기업만도 증기력과 전력의 절반 이상을 소비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트러스트의 숫자는 1900년에 185, 1907년에는 250개로 산정된다. 미국의 통계는 모든 기업을 개인회사private firm와 주식회사corporation로 분류한다. 후자는 1904년에 총 기업수의 23.6%, 1909년에는 25.9%, 1/4 이상을 차지했다. 이들은 또한 1904년에 총 노동자수의 70.6%, 1909년에는 75.6%, 3/4을 고용했다. 그리고 생산액은 109억 달러와 163억 달러, 즉 총 생산액의 73.7%79.0%였다.

 

때때로 카르텔과 트러스트는 특정 산업부문 전체 생산의 7할 내지 8할까지 자신들의 수중에 집적시키기도 한다. 라인베스트팔렌 석탄신디케이트는 1893년 설립 당시 그 지역 전체 석탄 생산의 86.7%, 1910년에는 이미 95.4%를 집적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독점은 거대한 이익을 보장하고 엄청난 규모의 기술적 생산단위를 형성시키게 된다. 미국의 유명한 석유트러스트인 스탠더드 석유회사Standard Oil Company1900년에 설립되었다.

 

 

그 공칭자본금은 15천만 달러였다. 그리고 1 억 달러의 보통주와 16백만 달러의 우선주가 발행되었다. 1900년부터 1907년까지 우선주에 지급된 배당은 각각 48, 48, 45, 44, 36, 40, 40, 40%였으며, 그 총액은 36,700만 달러에 달하고 있다. 1882년부터 1907년까지의 총 순익 88,900만 달러 가운데 6600만 달러가 배당금으로 분배되고 나머지는 적립금으로 비축되었다.”

 

“1907년 철강트러스트인 유나이티드 철강회사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의 전공장에는 21180명 이상의 노동자와 사무원이 있었다. 독일 광산업의 최대 기업인 겔젠키르헨 광산회사Gelsenkirchener Bergwerksgesellchaft에는 1908년에 46,048명의 노동자와 사무원이 있었다

 

 

이미 1902년에 위에서 언급한 미국의 철강트러스트는 철강 9백만 톤을 생산했다. 그 산출량은 1901년 미국 총 철강 생산고의 66.3%, 1908년에는 56.1%를 차지했으며 철광석 산출량은 1901년과 1908년에 각각 43.9%, 46.3%를 차지했다.

 

트러스트에 관해 미국 정부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트러스트가 경쟁기업에 대해 지니는 우위성은 거대한 경영규모와 우수한 기술설비에서 나오고 있다. 담배트러스트는 설립 이래로 육체노동을 대대적으로 기계노동으로 대체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이 목척을 위해 담배트러스트는 담배제조와 약간이라도 관계가 있는 특허는 모조리 사들였고 이를 위해 엄청난 금액을 지출했다. 그 중에는 쓸모없는 것들도 많아서 트러스트에 고용된 기사들의 손으로 사용 가능하도록 변경시키기도 했다. 1906년 말에는 특허취득만을 목적으로 하는 2개의 자회사가 설립되었다. 또한 같은 목적을 위해 트러스트는 자신이 직영하는 주물공장, 기계공장, 수선공장을 설립했다. 브루클린에 있는 이러한 공장 중의 하나는 평균 3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으며, 궐련, 여송연, 코담배, 포장용 은박지, 담뱃갑 등의 제조와 관련된 발명을 위한 실험을 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발명품들이 개선되고 있다.”

 

여타의 트러스트들도 역시 이른바 기술개발기사로서, 새로운 생산방법을 발명하고 기술개선을 위한 실험을 임무로 하는 기사들을 고용하고 있다. 유나이티드 철강회사는 기술적 효용을 높이거나 생산비를 절감사키는 발명을 한 노동자나 가사에게 거액의 상여금을 지급하고 있다.”

 

 

독일의 대공업, 예를 들면 최근 수십 년 동안 엄청나게 발전한 화학공업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기술개선사업이 조직되고 있다. 화학공업에서는 1908년에 이미 생산의 접적과정을 통해 2개의 주요 그룹이 만들어졌으며, 이들은 각기 나름대로 독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이들 그룹은 두 쌍의 대공장으로 이루어진 ‘2사 연합이었으며, 각 그룹은 2,000~2,100만 마르크의 자본금을 가지고 있었다. 한쪽은 회흐스트에 있는 마이스터 공장의 후신과 프랑크푸르트 암 마안에 있는 카첼라 공장의 연합이고, 다른 한쪽은 루드비히샤펜에 있는 아닐린·소다 공장과 엘버펠트에 있는 바이엘 공장 후신의 연합이었다. 양 그룹 중 전자는 1905년에, 후자는 1908년에 각각 또 다른 대공장과 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각기 4,000~5,000만 마르크의 자본을 가진 두 개의 ‘3사 연합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두 연합은 이미 상호 접근과 가격에 관한 협약등을 시작하고 있었다.

 

경쟁은 독점으로 전화한다. 그 결과 생산의 사회화가 현저하게 진전된다. 특히 기술의 발명이나 개선과정도 사회화된다.

 

이것은 과거와 같이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분산된 채 미지의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생산하던 제조업자들 간의 자유경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집적은 엄청나게 진전되었으며, 후에 살펴보겠지만, 한 나라만이 아니라 많은 나라, 아니 전 세계의 모든 원료자원(예컨대 철광석의 매장량)을 대략적으로 산정할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렇게 산정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원료자원은 거대한 독점 연합들monopolist associations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또한 대략적인 시장의 크기도 산정하여, 연합들은 협정을 통해 자기들 사이에서 시장을 분할해 버린다. 숙련노동이 독점되고, 일급 기술자들이 고용되며, 운송수단미국의 철도, 유럽과 미국의 선박회사이 장악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러 생산의 전면적인 사회화에 바짝 접근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을 그들의 의지나 의식에 반하여 어떤 새로운 사회질서, 곧 완전한 자유경쟁으로부터 완전한 사회화로의 과도적인 질서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생산은 사회화되지만, 소유는 여전히 사적이다. 즉 사회적 생산수단은 여전히 소수의 사적 소유로 남아 있다. 형식적으로 인정된 자유경쟁의 일반적 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소수의 독점기업들monopolists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씌우는 멍에는 한층 무거워지고 가혹해지고 견디기 힘든 것이 된다.

 

독일의 경제학자 케스트너는 카르텔과 아웃사이더(즉 카르텔에 가입하지 않은 자본가)의 투쟁을 특별히 다룬 연구서를 썼다. 그는 이 책 제목을 강제적 조직(Compulsory Organisation)이라 붙였다. 물론 자본주의를 참된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했다면, 저자는 독점단체에 대한 강제적 복종을 주제로 책을 써야 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오늘날 독점단체가 사용하고 있는 조직을 위한 최신의 문명화된 투쟁방법의 목록을 대강 훑어보는 것도 유용할 듯싶다. 원료 공급의 중단(……카르텔 가업을 강제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 동맹에 의한 노동력 공급의 중단(, 노동자는 카르텔기업에만 취업한다는 자본가와 노동조합 사이의 협정), 운송의 중단, 판로의 봉쇄, 카르텔하고만 거래한다는 구매자와의 협정, 체계적인 할인판매(‘아웃사이더’, 즉 독점기업에게 복종하지 않는 기업을 파멸시키기 휘한 것. 이들은 일정 기간 원가 이하로 판매하기 위하여 수백만 마르크의 지출도 불사한다. 석유 가격이 40마르크에서 22마르크로, 거의 절반으로 인하된 예도 있었다!), 신용거래 중단, 보이코트 선언.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미 대기업과 소기업의 경쟁, 기술적으로 선진적인 기업과 낙후된 기업 사이의 경쟁이 아니다. 우리 바로 독점에, 그 굴레에, 그 전횡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독점에 의해 교살당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한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의식에 다음과 같이 반영되고 있다.

 

케스트너는 이렇게 쓴다.

 

 

순수하게 경제적인 영역에서조차 종래 의미에서의 상업 활동으로부터 조직적·투기적 활동으로 옮아가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가장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 사람은, 기술적·상업적 경험에 의하여 구매자의 욕구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예상하고 잠재적인 수요를 발견하고 일깨울수 있는 상인이 아니라, 조직의 발전 및 개별 기업과 은행 간의 일정한 관련 가능성을 예측하든가 적어도 예감할 수 있는 투기의 천재[?!]이다.……

 

 

일상적인 말로 번역하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은 이미, 비록 상품생산이 아직 지배하고 있으며 경제생활의 토대로 간주된다 해도 실제로는 완전히 파괴되어 이윤의 대부분이 금융조작의 천재들에게 돌아가게 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금융조작과 사기의 토대는 물론 생산의 사회화이지만, 이러한 사회화를 이룩한 인류의 거대한 진보는 투기꾼만을 이롭게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나중에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한 쁘띠부르주아적 비판이 바로 위와 같은 근거에서 자유롭고’, ‘평화롭고’, ‘공정한경쟁으로의 복귀를 꿈꾸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케스트너는 이렇게 말한다.

 

 

카르텔이 형성된 결과로 나타난 가격의 지속적 상승 현상은 지금까지 특히 석탄··칼륨 등의 중요한 생산수단에 있어서만 관찰되었을 뿐, 제조상품에 있어서는 관찰된 적이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격의 상승에 기인하는 이윤의 증가도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산업만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관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카르텔을 형성함으로써 (반제품이 아닌) 원료를 가공하는 산업은 완제품산업의 희생 하에서 높은 이윤형태로의 이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자유경쟁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후자에 대한 지배적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위에서 진하게 표시한 말이야말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마지못해서, 그것도 매우 드물게 인정하고 있으며, 오늘날 카우츠키를 필두로 한 기회주의의 옹호자들이 그토록 열심히 발뺌하고 거부하려 노력하고 있는 사태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지배, 또 이와 관련된 강제,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발전의 최근latest국면에 있어 전형적인 관계인 동시에, 전능한 경제적 독점체의 형성으로부터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또 실제로 발생한 불가피한 결과이다.

 

카르텔이 사용하는 수단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완료자원의 모든, 혹은 주요한 원천을 장악할 수 있는 곳에서는 카르텔의 발생과 독점의 형성이 특히 용이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원료자원을 매점할 수 없는 산업부문에서는 독점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예를 들어 시멘트 산업의 원료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이 산업 역시 강력하게 카르텔 화되어 있다. 시멘트 제조업자들은 남부독일이나 라인베스트팔렌 등의 지역별 신디케이트를 형성하고 있다. 가격은 독점으로 고정되어 있으므로, 차량 1대분의 생산비가 180마르크인데도 가격은 230~280마르크이다! 이들 기업은 12% 내지 16%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적 투기의 천재들은 배당으로 분배되는 것 이외에도 거액의 이윤을 호주머니에 챙길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수익성이 좋은 산업으로부터 경쟁을 배제하기 위해 독점자들은 다양한 책략까지 이용한다. 그들은 자기들 산업의 상태가 나쁘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신문지상에 자본가들이여! 시멘트 업에 투자하지 말라!”는 경고를 게재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아웃사이더’(신디케이트에 가입하지 않은 기업들)를 사버리고 그들에게 6, 8, 때로는 15만 마르크까지 보상금을 지불한다. 경쟁자에게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는 미국식 방법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모든 수단을 다해 스스로 진로를 개척해 나간다.

 

카르텔이 공황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본주의를 미화하려고 애쓰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퍼뜨린 이야기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몇몇 산업부문에서 생성된 독점은 자본주의적 생산 전체에 고유한 무정부성을 강화하고 심화시킨다. 자본주의의 일반적 특징인 농업발전과 공업발전 사이의 불균형 또한 점점 확대된다. ‘독일 대은행과 공업의 관계에 대하여 뛰어난 노작들을 저술한 야이델스가 인정하고 있듯이, 가장 고도로 카르텔화 된 이른바 중공업, 특히 석탄업과 철공업의 특권적 위치는 산업부문에서 한층 심각한 조정의 결여를 야기하고 있다.

 

뻔뻔스러운 자본주의 옹호자 리프만은 이렇게 쓰고 있다.

 

 

경제체계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그것은 보다 위험한 기업이나 외국의 기업 또는 발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기업, 또 지방적 중요성밖에 가지지 못하는 기업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된다.”

 

 

위험의 증대는 결국 자본의 막대한 증대와 연결되며, 이 자본은 물이 그릇을 넘치듯이 국외로 흘러넘친다. 동시에 급속한 기술진보로 말미암아 국민경제의 다양한 영역에는 불균형의 요소가 증가하며 마침내 무정부상태나 공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리프만도 다음과 같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인류는 머지않은 장래에 훨씬 중요한 기술혁명을 겪게 될 것이고, 이는 또한 경제체계의 조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전기, 항공……이러한 근본적인 경제적 변동의 사기에는 일반적으로 대규모의 투기가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모든 종류의 공황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경제공황은 또 역으로 집적과 독점으로의 경향을 현저하게 심화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미 보았듯이 현대 독점의 역사에서 전환점이었던 1900년 공황의 의미에 대한 야이델스의 고찰은 극히 유용하다.

 

 

“1900년 공황기에는 기초산업부문에서의 거대공장과 아울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는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으로 조직된 공장, 즉 산업적 호황기의 정점에서 생성되었던 순수한’(결합되지 않은) 기업이 아직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가격의 하락과 수요의 감퇴는 이들 순수한기업들을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넣었지만 거대 합동기업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거나 극히 단기간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이었다. 그 결과 1900년 공황은 1873년 공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산업의 접적을 가져왔다. 1873년 공황도 일종의 우량기업을 선발해 내기는 했지만, 당시의 기술수준에서 이 선발은 공황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온 기업들을 독점으로 이끌 수 없었다. 지속적인 독점의 대부분은 매우 복잡한 기술수준, 광범위한 조직망, 거대한 자본규모를 갖춘 현대 철강·제철·전기산업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 일부는 기계산업 및 금속·운송산업 등에 존재하고 있다.”

 

 

독점! 이 단어는 자본주의 발전의 최근국면을 정확히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은행이 수행하는 역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대 독점체의 진정한 힘과 의미에 대해 극히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며, 빈약한 이해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2장 은행과 그 새로운 역할

 

 

은행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지불과정의 중개이다. 이를 통해 은행은 유휴화폐자본을 가동자본, 곧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으로 전화시킨다. 즉 은행은 모든 종류의 화폐소득을 모아 자본가계급의 관리에 맡기는 것이다.

 

은행업무가 발전하고 소수의 수중으로 집적됨에 따라, 은행은 중개자라는 소극적인 역할로부터 탈피하여, 거의 모든 자본가와 소경영주의 화폐자본 및 한 나라 혹은 여러 나라의 생산수단과 원료자원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강력한 독점체가 된다. 소극적인 중개자로부터 한 줌의 독점체로의 이러한 전화야말로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로 성장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과정의 하나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선 은행업무의 집적에 대해 자세히 고찰해야 한다.

 

1907~08, 1백만 마르크 이상의 자본을 가지는 독일 주식은행의 예금총액은 70억 마르크에 달했다. 1912~13년에는 이 예금총액이 이미 98억 마르크에 달하여, 5년 사이에 40%가 증가하였다. 더구나 이 증가된 28억 마르크 가운데 275천만 마르크는 1천만 마르크 이상의 자본을 가지는 57개 은행의 증가분이었다. 대은행과 소은행 사이의 예금액 분포는 다음과 같다(p.60의 표).

 

 

예금총액의 백분율

 

(단위:%)

 

베를린

 

9대 은행

 

1천만 마르크 이상의 자본을 소유한 48개 은행

 

1백만~1천만 마르크의 자본을 소유한 115개 은행

 

소은행(1백만 마르크 이하의 자본)

 

1907~08

 

1812~13

 

47

 

49

 

32.5

 

63

 

16.5

 

12

 

4

 

3

 

 

소은행은 대은행에 밀려나고 있으며, 불과 9개의 대은행이 총 예금액의 거의 절반을 집적하고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예컨대 수많은 소은행이 사실상 대은행의 지점화 되고 있다는 점 등의 많은 중요한 사실들이 고려되지 않았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1913년 말에 슐츠-게페르니츠는 전체 예금액 약 100억 마르크 중 51억 마르크가 베를린 9대 은행에 예금되어 있다고 추정했다. 예금액뿐만 아니라 총 은행자본까지 고려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1909년 말에 베를린 9대 은행은 그들과 제휴하고 있는 은행들과 합쳐서 113억 마르크, 즉 전체 독일 은행자본의 약 83%를 장악하고 있었다. 도이치 은행(Deutsche Bank) 은 그것과 제휴하고 있는 은행들과 합쳐서 약 30억 마르크를 장악하고 있는데, 이 은행은 프러시아 국유철도금고와 함께 구세계에 있어서 최대의, 동시에 가장 비집중화 된 자본의 축적이다.”

 

내가 제휴하고 있는 은행이라는 말을 특히 강조한 까닭은 그것이 현대 자본주의적 접적의 가장 중요한 특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특히 대은행은 군소기업과 은행을 완전히 흡수해 버리기도 하지만, 그들 자본의 일부를 소유하거나 주식을 구매하고 교환함으로써, 또 신용체계를 이용함으로써 그들을 합병하고 종속시키며 자신의그룹 또는 (전문용어로 말하면) ‘콘체른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리프만 교수는 현대의 지주(持珠 : holdings) 및 금융회사에 대해 약 5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을 내놓았으나 유감스럽게도 그 책은 잘 소화되지 않은 기본자료에다 매우 애매모호한 이론적고찰을 덧붙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지주제도가 집적이라는 측면에서 어떠한 결과를 야기하는가는 그 자신 도 은행가인 리써가 독일의 대은행에 관해 쓴 책에서 가장 잘 예증 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자료를 고찰하기 전에 지주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도이치 은행그룹, 최대는 아니라 할지라도 최대 은행그룹 중의 하나이다. 이 그룹의 모든 은행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주요한 끈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1, 2, 3차의 지주형태’, 혹은 같은 의미가 되겠지만 제1, 2, 3차의 종속(도이치 은행에 대한 군소 은행의 종속)을 구별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다음 표를 얻을 수 있다.

 

 

 

직접 또는

 

1차 종속

 

2차 종속

 

3차 종속

 

도이치 은행의 지주

 

영구적 참여

 

17개 은행

 

17개중 9개는

 

34개 타은행에 지주

 

9개 중 4개는

 

7개 타은행에 지주

 

기한을 확정치

 

않은 참여

 

5개 은행

 

 

 

간헐적 참여

 

8개 은행

 

8개 중 5개는

 

14개 타은행에 지주

 

14개 중 6개는

 

9개 타은행에 지주

 

 

 

30개 은행

 

30개 중 14개는

 

48개 타은행에 지주

 

14개 중 6개는

 

9개 타은행에 지주

 

 

도이치 은행에 간헐적으로종속되는 1차 종속8개 은행 중에는 외국은행이 3개 있다. 하나는 오스트리아 은행(빈 은행연합)이고, 두 개는 러시아 은행(시베리아 상업은행과 러시아 외국무역 은행)아다. 도이치 은행그룹에는 직접적·간접적으로, 또는 전체적·부분적으로 모두 87개의 은행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전체 자본도이치 은행이 직접 소유하고 있는 자본과 그 통제 하에 있는 은행의 자본은 약 20억 내지 30억 마르크로 추정된다.

 

이러한 그룹의 선두에 서 있는 은행, 그리고 국채발행과 같이 예외적으로 크고 수익이 높은 금융업무를 위하여 자신과 비슷한 규모의 다른 대여섯 개 은행과 협정을 맺고 있는 은행들은 이미 중개자의 역할을 벗어나서 명백히 한 줌의 독점체들의 연합으로 전화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독일에서 은행업무의 접적이 어느 정도 급속히 진행되었는가는 여기에 간략한 형태로 인용한 리써의 자료에서 알 수 있다.

 

 

베를린 6대은행의 지점망

 

 

독일 내 지점

 

저축은행과 거래사무소

 

독일주식은행 내의 항상적 지주

 

총지점수

 

1985

 

1900

 

1911

 

16

 

21

 

104

 

14

 

40

 

276

 

1

 

8

 

63

 

42

 

80

 

450

 

 

우리는 여기서 모든 자본과 화폐수입을 집중시키고, 분산되어 있는 수천수만의 기업을 단일한 전국적인 자본주의 경제로, 나아가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제로 전화시키는 조밀한 통로 망이 급속히 발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현대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슐츠­게페르니츠가 앞에서의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비집중화, 사실상 이전에는 비교적 독립적이었던,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역적이었던 수많은 경제단위들이 점점 단일한 중심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사실상 이것은 집중이며, 거대독점체의 역할과 중요성 및 힘의 증대이다.

 

보다 오래된 자본주의 나라에서 이러한 은행망은 특히 조밀하다. 1910년에 영국(아일랜드를 포함하여)에는 모두 7,1517개의 은행 지점들이 있었다. 4개의 대은행이 각기 400개 이상(4477개에서 689개까지)의 지점을 갖고 있었고, 다른 4개의 대은행이 각기 200개 이상의 지점을 갖고 있었으며, 그리고 또 다른 11개의 대은행이 각기 100개 이상의 지점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3개의 거대은행인 리용 신용금고(Credit Lyonnais), 국립은행 (Comptoir National), 소시에떼 제네랄(Societe Generale)이 다음과 같이 그 업무와 지점망을 확장했다.

 

 

지점과 사무소의 수

 

자본(10만 프랑)

 

지방

 

파리

 

총계

 

자기자본

 

자본으로 사용되는 예치금

 

1870

 

1890

 

1909

 

47

 

192

 

1,033

 

17

 

66

 

196

 

64

 

258

 

1,229

 

200

 

265

 

887

 

427

 

1,245

 

4,363

 

현대의 대은행이 지니고 있는 관련망(connections)’을 보여주기 위해서, 리써는 독일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커다란 은행 중의 하나인 디스콘토-게젤샤프트 (Disconto-Gesellschaft, 1914년 그 자본금은 약 3억 마르크에 달했다)가 발행하고 인수하는 어음의 양에 대해 다음과 같은 도표를 제시한다.

 

 

수신서한

 

발송서한

 

1852

 

1870

 

1900

 

6,135

 

85,800

 

533,102

 

6,292

 

87,513

 

626 ,043

 

파리의 대은행인 리용 신용금고의 구좌수는 1875년의 28,535개에서 1912633,539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간단한 수치들은 아마 장황한 논문보다도 자본의 집적과 은행거래액의 증가가 은행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더욱 잘 보여줄 것이다. 흩어져 있는 자본가들은 하나의 집단적 자본가로 전화되었다. 소수의 자본가를 위해 당좌계정을 개설할 때 은행은 이를테면 순수히 기술적이고 완전히 보조적인 활동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면, 한 줌의 독점체가 전체 자본주의사회의 모든 상업적·산업적 활동을 그들의 의지에 종속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 독점체는은행거래 관계, 당좌계정, 기타의 금융업무를 통해우선 개별 자본가들의 재정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고, 또 신용을 제한하거나 확장함으로써 혹은 저지하거나 용이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통제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들의 소득을 결정하고 그들로부터 자본을 박탈하거나 그들의 자본을 급속하게, 그리고 엄청난 규모로 증가시키도록 허용하는 등 그들의 운명을 전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금 전에 베를린의 디스콘토-게젤샤프트가 3억 마르크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은행자본의 이러한 증가는, 베를린에 있는 두 개의 거대은행도이치 은행과 디스콘토사이의 헤게모니투쟁에서 생겨난 부수적 사건들 중의 하나이다. 1870년에 당시 신참이었던 전자의 자본은 불과 1,500만 마르크였으나, 후자는 3,000만 마르크를 가지고 있었다. 1908년에 전자는 2억 마르크의 자본을 소유하였던 반면, 후자는 l7천만 마르크를 소유하였다. 1914년에 전자는 자본을 25천만 마르크로 늘렸으며, 후자는 또 다른 일급 대은행인 샤프하우젠셔 은행연합 (Schaaffhausenscher Bankverein)과의 합병에 의해 자본을 3억 마르크로 늘렸다. 물론 이러한 헤게모니투쟁과 보조를 맞추어 두 은행 사이의 협정은 더욱 더 빈번해지고 더욱 더 지속적으로 되어 갔다. 이러한 발전은, 극히 온건하고 신중한 부르주아개량주의의 틀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 관점에서 경제문제를 고찰하는 은행전문가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한다.

 

독일의 잡지 은행은 디스콘토-게젤샤프트의 자본이 3억 마르크로 증가한 데 대해 논평하는 가운데 이렇게 쓰고 있다. “다른 은행들도 이와 동일한 경로를 걸을 것이며, 오늘날 독일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300명의 사람들도 점차 50, 25명 혹은 그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최근의 집적운동이 은행분야에만 국한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개별 은행들의 관계가 밀접해지면, 이들 은행과 관련된 산업 신디케이트들 간의 접근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어느 게인 날 아침 깨어 일어나 보니 놀랍게도 우리 눈앞에는 트러스트만이 있을 뿐이며, 우리는 사적 독점을 국가독점으로 대체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사물이 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 이외에는증권 조작으로 약간 가속시키기는 했지만우리 자신을 비난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부르주아 저널리즘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실례인데, 그것이 부르주아과학과 다른 점은 후자가 보다 성실치 못하다는 점, 후자가 사물의 본질을 흐리게 하며,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뿐이다. 접적의 결과를 보고 경악한 다든가, 자본주의 독일정부 또는 자본주의 사회’(‘우리 자신’)비난한다든가, 혹은 독일의 카르텔전문가 치르슈키와 같이, 카르텔은 트러스트처럼 기술적· 경제적 진보를 과도히 가속화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에서, 미국식 트러스트를 두려워하고 독일식 카르텔은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식제도의 도입이 집적을 가속화시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든가 하는 따위이것이 도대체 무기력함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다. 분명히 독일에는 트러스트가 없고 카르텔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불과 300명 정도의 거대자본가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들의 수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 어쨌든 은행은 나라마다 은행법이 각각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 있어서 독점체의 형성과 자본집적 과정을 한층 심화시키고 가속화시키는 것이다.

 

이미 반세기 전에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은행제도는 확실히 사회적 차원에 있어서 보편적 부기형태와 생산수단의 보편적 분배형태를, 그러나 단지 형태만을 취하고 있다.”고 쓴 바 있다(러시아어판, 3, 2, p. 144). 은행자본의 증대, 거대은행들의 지점 및 사무소의 증가, 그 예금구좌의 증가 등에 관해 앞에서 인용한 수치들은 자본가계급 전체의 그러한 보편적 부기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 그것은 자본가들의 부기뿐만이 아니다. 은행은 비록 일시적이지는 하나 기업가나 점원 및 극소수 상층 노동계급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화폐수입을 긁어모으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보편적 분배는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수십억에 달하는 돈을 통제하고 있는 현대의 은행들프랑스의 3~6, 독일의 6~8개 대은행로부터 성장한 것이다. 그려나 실질적인 면에서 볼 때, 생산수단의 분배는 전혀 보편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사적이다. , 그것은 대중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으며, 일체의 농업발전이 산업발전에 비해 절망적으로 뒤처져 있는 한편, 산업 내부에서도 중공업이 다른 산업부문들로부터 공물을 거둬들이는 조건하에서 활동하는 대자본, 특히 거대독점자본의 이해와 일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사회화와 관련하여, 저축은행과 우체국이 은행과의 경쟁을 시작하고 있다. 저축은행과 우체국은 은행보다 비집중화되어 있다. , 그들의 영향은 보다 많은 지방, 보다 외딴 장소, 보다 광범한 인구 층으로 확대된다. 다음은 미국의 한 위원회가 수집한 은행예금과 저축은행예금의 증가를 비교한 자료이다.

 

 

예금액

 

 

영국

 

프랑스

 

독일

 

은행

 

저축은행

 

은행

 

저축은행

 

은행

 

신용금고

 

저축은행

 

1880

 

1888

 

1908

 

84

 

124

 

232

 

16

 

20

 

42

 

?

 

15

 

37

 

9

 

21

 

42

 

5

 

11

 

71

 

4

 

4

 

22

 

26

 

45

 

139

 

 

저축은행은 예금에 따}해서 4% 4.25%의 이자를 지불하기 때문에, 자기들 자본을 종식시킬 보다 수익성이 높은투자대상을 찾아야 하며 어음과 저당 등도 취급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은행과 저축은행 사이의 경계선은 점점 더 불명확해진다.’ 한 실례로 보쿰과 에르푸르트의 상업회의소는 저축은행이 어음할인과 같이 순수한은행업무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고, 우체국의 은행업무를 제한할 것을 요구한다. 은행업의 거두들은 국가독점이 뜻하지 않은 방면에서 자신들을 엄습해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이, 말하자면 같은 사무실에 있는 두 명의 과장이 가지는 경쟁의식을 표현한 데 불과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저축은행에 예탁된 수백만의 자본은 사실상 궁극적으로는 바로 같은 은행자본의 거두들에 의해 통제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국가 독점이란 단지 몇몇 산업부문에서 파산에 직면한 백만장자들의 수입을 보장하고 증가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경쟁이 지배했던 낡은 행태의 자본주의에서 독점이 지배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로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증권거래소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데서 나타난다. 은행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증권거래소는, 은행이 아직 새로이 발행되는 증권의 대부분을 고객에게 전해 줄 수 없었던 때 가지고 있었던 필수불가결한 거래중개인으로서의 가능을 이미 오래 전에 상실하였다.”

 

“‘모든 은행은 증권거래소이다.’ 은행이 점점 커질수록, 은행업무의 접적이 보다 진전될수록, 이 현대의 격언은 보다 진실하게 들린다.” “일찌기 70년대에는 젊은 혈기가 흘러넘쳤던”(이는 1873년의 증권거래소 파산과 창업 스캔들 등에 대한 미묘한암시이다) “증권거래소가 독일 산업화의 시대를 열었지만 오늘날 은행과 산업은 혼자서 꾸려나갈 수 있다.’ 증권거래소에 대한 대은행의 지배는……완전하게 조직된 독일이라는 산업국가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리하여 자동적으로 기능하는 경제법칙의 작용영역이 제한되고 은행에 의한 의식적 규제영역이 현저히 증대하면 소수의 지도자가 국민경제에 대해서 지나는 책임 역시 엄청나게 증가한다.” 이것이 곧 독일 제국주의의 옹호자이며 모든 나라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권위자로 인정되고 있는 슐츠-게페르나츠가 하는 말이다. 그는 경제생활에 대한 은행의 의식적 규제완전하게 조직된한 줌의 독점체들에 의한 대중약탈이라는 사소한 사실을 얼렁뚱땅 넘기려 하고 있다. 부르주아 교수의 임무는 전체 메카니즘을 해명하고 은행독점체의 온갖 책동을 폭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미화하는 데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다 권위 있는 경제학자이자 스스로 은행가이기도 리써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얼버무리기 위하여 무의미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증권거래소는 전체 국민경제, 특히 유가증권 유통에 절대 필요한 특질증권거래소에 수렴되는 경제운동의 가장 정확한 측정기일 뿐만 아니라, 거의 자동적인 조절기라는 특질을 끊임없이 잃어가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낡은 형태의 자본주의, 즉 증권거래소라는 필수불가결한 조절기를 가졌던 자유경쟁의 자본주의는 소멸하고 있다. 이것에 대신하여 나타난 새로운 자본주의는 과도적인 형태, 즉 자유경쟁과 독점의 혼합물로서의 명백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이 새로운 자본주의는 무엇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가? 그러나 부르주아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제기를 두려워한다.

 

“30년 전, 서로 자유로이 경쟁하고 있던 기업가들은 육체노동을 제외한 경영노동의 9할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현재는 고용된 사무원이 이러한 두뇌노동의 9할을 수행하고 있다. 은행업무는 이러한 변화의 가장 선두에 서 있다.” 슐츠-게페르니츠의 이러한 고백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하나의 의문을 제가하게 만든다. 이 새로운 자본주의, 즉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는 무엇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가?

 

집적과정의 결과로 자본주의 경제 전체의 선두에 서게 된 몇몇 은행들 가운데서는 자연히 독점적 협정, 곧 일종의 은행트러스트를 향한 경향이 점점 현저하게 드러난다. 미국에는 9개가 아니라, 2개의 가장 커다란 은행, 즉 억만장자 록펠러와 모르간의 은행이 110억 마르크의 자본을 지배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디스콘토-게젤샤프트에 의한 샤프하우젠셔 은행연합의 합병에 대해 증권거래소의 기관지인 프랑크푸르트 신문(Frankfurter Zeitung)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은행의 집적운동은 신용대부를 할 수 있는 영업소의 범위를 좁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대산업을 소수의 은행그룹에 더욱더 종속시키고 있다. 그리고 산업과 금융계 사이의 밀접한 연관은 은행자본을 필요로 하는 산업회사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산업은 은행의 트러스트화가 성장하는 것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실제로 대은행콘체른들 사이에서는 경쟁의 제한을 목표로 하는 협정의 단초가 이미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다.”

 

은행업 발전에서의 마지막 말도 역시 독점이다.

 

은행과 산업 사이의 밀접한 연관에 대해서 말한다면, 은행의 새로운 역할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은 아마도 바로 이 분야일 것이다. 은행이 기업의 어음을 할인하고 당좌계정을 개설하는 등의 일을 할 때, 이들 업무는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 기업의 독립성을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으며, 은행도 중개자라는 소극적인 역할을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업무가 더욱 늘어나고 항상적인 것이 될 때, ‘은행이 자기 수중에 막대한 자본을 긁어모으게될 때, 기업의 당좌계정을 운영함으로써 은행이 고객의 경제 상태에 대해 보다 완전하고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될 때(이것이 곧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 결과 산업자본가는 보다 완전하게 은행에 종속당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은행과 거대 상공업기업 사이에는, 주식의 획득을 통하여, 그리고 상공업기업의 이사회(또는 감사회)에 은행 이사를 임명하거나 또는 그 반대의 경우를 통하여 상호 통합됨으로써, 이를테면 모종의 인적 결합이 이루어진다. 독일 경제학자 야이델스는 이러한 자본과 기업의 집적형태에 대하여 매우 상세한 자료를 수집했다. 베를린 6대은행은 자기들 은행의 중역을 344개 산업회사에, 또 자가들 이사진을 다른 407개 산업회사에 파견하여 도합 751개의 회사 내에 은행의 대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289개 회사에서 이들 은행은 각 이사회에 두 명씩의 대표를 갖고 있거나 이사회 회장의 직책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공업회사는 보험, 운수업, 요식업, 극장, 미술공예업 등 극히 다양한 산업부문에 걸쳐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6대은행의 이사회에는(1910년에) 크루프 회사나 강력한 하파크’(함부르크-아메리카 라인) 등의 지배자를 포함하여 거대산업가 51명이 포함되어 있다. 1895년부터 1910년까지 이 6대 은행은 각기 수백 개(281개부터 419개까지) 산업회사의 주식과 사채발행에 참여했다.

 

은행과 산업 사이의 인적 결합은 이들과 정부와의 인적 결합에 의해 보완된다. 야이델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사회의 의석은 관청과의 관계를 매우 용이하게[!!] 유지할 수 있는 명망가나 퇴직관리들에게 스스럼없이 제공된다.”……대은행의 이사회에는 대개 국회의원이나 베를란 시의회 의원이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대독점체의 건설과 발전은 말하자면, ‘자연적초자연적방법에 의해 전속력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수백 명의 금융왕 사이에는 일종의 분업이 체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은행 이사회에 참가하는 등] 대산업자들의 활동영역이 확장되고, 은행의 지방 간부들이 특정한 산업구역만을 한정하여 관할하게 됨에 따라 대은행의 중역들 사이에는 전문화가 진전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전문화는 은행업무의 규모가 커질 때, 특히 은행이 산업과 광범위한 관계를 맺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분업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전체 산업과의 관계가 전문기능으로서 한 중역에게 위탁되는 방식이다. 또 하나는 각 중역들이 몇 개의 개별 기업 또는 같은 산업분야에 있거나 비슷한 이해관계를 가진 기업군에 대한 감독을 맡는 방식이다……[자본주의는 이미 개별 기업을 조직적으로 감독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어떤 이는 독일 국내산업, 때로는 서부독일 산업[서부지방은 독일에서 가장 공업화된 지방이다]만을 전담하고, 또 어떤 이들은 외국 및 외국산업과의 관계, 기업가 또는 기타 사람들에 관한 정보, 증권 거래소 업무 등등을 전담한다. 그밖에 각 은행중역들은 흔히 특정 지방이나 특정 산업부문의 관리를 맡는다. , 어떤 사람은 주로 전기회사의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화학공장, 양조공장, 제당공장에서 활동하며, 또 어떤 사람은 몇 개의 격리된 기업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보험회사의 이사회에서 활동하기도 한다.……요컨대 대은행에서 업무의 규모와 다양성이 증대함에 따라 그 중역들 사이에서 분업이 점점 증대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 목적(및 결과)은 그들을 순수한 은행업무 담당자 이상으로 어느 정도 끌어올려, 산업의 일반적 문제와 각 산업부문의 특수한 문제에 대하여 정통하고 보다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고, 또 그럼으로써 은행의 세력권에 있는 각 산업영역 내에서 그들이 보다 큰 활동력을 갖게 하려는 데 있다. 또한 은행은 기업가, 전직 관료, 특히 철도업이나 광산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은행의 이사진으로 선출하려 노력함으로써 그러한 체계를 보완한다.”

 

약간 형태는 다르지만 프랑스 은행계에서도 같은 체계가 발견된다. 한 예로 프랑스 3대 은행 중의 하나인 리용 신용금고는 금융조사소(service des etudes financieres)를 설치하고, 50명 이상의 기술자·통계학자·경제학자·법률가 등을 상임으로 고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매년 60~70만 프랑의 경비가 소요된다. 이 조사소는 다시 8개 부서로 세분된다. , 1부서는 기업체에 관한 정보, 2부서는 일반통계, 3부서는 철도회사와 선박회사, 4부서는 유가중권, 5부서는 금융보고서를 담당하는 식이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은행자본과 산업자본 간의 합병, 또는 부하린이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그 유착이 증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은행이 참으로 보편적 성격을 지닌 기관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 주제를 가장 깊이 연구해 온 야이델스의 정밀한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산업적 제관계를 총체적으로 조사해 보면 산업을 대신하여 활동하는 금융기관의 보편적 성격을 볼 수 있다. 다른 종류의 은행과는 반대로, 그리고 문헌상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듯이 자기 지역을 잃지 않으려면 은행은 한 가지 사업 또는 산업부문으로 전문화되어야 한다는 사실과는 반대로, 대은행은 지역에서나 산업부문에서나 가능한 한 다양한 산업체들과 연관을 맺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개별 기업들의 역사적 발전으로 인한 지역 및 산업부문들 간의 자본 분배의 불균등성을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다.” “산업과의 관계를 전반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하나의 경향이 있으며, 그 관계를 항구적이고 밀접한 것으로 만들려는 또 다른 경향이 있다. 6대은행에서는 이 두 가지 경향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정도로, 또 서로 같은 정도로 실현되어 있다.

 

상공업계는 흔히 은행의 횡포에 대해서 불평한다. 다음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은행이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이러한 불평소리가 드높아지는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011119일 소위 베를린 ‘D’은행(4개 대은행의 이름이 D자로 시작한다) 중의 하나가 독일 중부 북서 시멘트신디케이트 이사회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번 달 18일자 모 신문에 실린 귀사의 공고를 보고서 우리는 이번 달 30일의 귀 신디케이트 총회에서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귀 기업의 변화를 가져올 결의가 채택될 가능성이 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이전까지 귀사에 공여해 왔던 신용을 회수하지 않을 수 없음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그러나 만일 그 총회에서 우리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의가 채택되지 않고, 또 앞으로도 이 점을 확실히 보장해 주신다면, 우리는 기꺼이 새로운 신용공여에 관해 귀사와 상의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고자 합니다.”

 

사실상 그것은 대자본의 억압에 대한 소자본의 해묵은 불평이지만, 이 경우 자본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한 신디케이트 전체이다! 소자본과 대자본 간의 오랜 투쟁은 이제 새롭고도 엄청나게 높은 발전단계에서 재현되고 있다. 수십억의 자본을 가진 대은행 산하 기업들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방법으로 기술적 진보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면 은행은 기술연구를 위한 특수한 단체들을 설립하는데, 여기서 얻은 성과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은행과 우호적관계에 있는 산업체들뿐이다. 이러한 법주에 속하는 것으로서는 전기철도연구협회, 중앙과학기술연구소 등이 있다.

 

대은행의 이사들 자신도 국민경제의 새로운 조건들이 창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룹은 이러한 현상에 직면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야이델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최근 대은행의 이사진이나 중역진의 변화를 관찰해 보면, 누구나 대은행이 산업의 전반적 발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 보다 중요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권력이 점차 넘어가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인물들과 기존의 은행중역들 사이에는 업무상의 때로는 인격적인 불화까지 증대하고 있다. 이 경우 실제로 문제되는 것은 은행이 이렇게 산업에 개입함으로써 신용기관으로서 은행의 업무 자체가 피해를 입지는 않는가, 또는 신용을 매개하는 역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은행을 이전보다도 한층 경기변동 의 맹목척인 흐름 속으로 끌어들이는 활동에 은행이 참가함으로써 견실한 원칙과 보장된 이윤이 희생되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대다수 은행중역들의 견해인 반면, 새로운 은행중역의 대부분은 산업에 대한 적극적 개업을, 현대의 대산업과 동시에 대은행 및 현대의 산업적 은행업무가 생겨난 것만큼이나 필연적인 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는 한 가지 점에서만은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곧 대은행의 새로운 활동이 아직 확고한 원칙도, 구체적인 목표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낡은 자본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무언가로의 이행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독점과 자유경쟁을 화해시키려는 목적으로 확고한 원칙과 구체척인 목표를 찾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실무자들의 고백은 슐츠-게페르니츠, 리프만 및 이들과 유사한 이론가등의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소리높여 외치는 조직된 자본주의의 매력에 대한 공공연한 찬양과는 완전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대은행의 새로운 활동이 최종적으로 확립된 것은 정확히 언제였는가? 야이델스는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 상당히 정확한 대답을 주고 있다.

 

새로운 내용·형태·기관에 의한 은행과 산업기업 사이의 연관, 달리 말해 집중적인 동시에 비집중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대은행은 1890년대 이전만 해도 전혀 특징적인 경제현상이 아니었다.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 그 출발점은, 중요한 기업합동들이 일어나고, 은행의 산업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비집중적 조직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던 1897년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출발점은 좀 더 늦은 1900년의 공황기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황에 의해 비로소 산업 및 은행에서의 집적과정은 엄청나게 가속화·격화되고 한층 강력해졌으며, 산업과의 연관을 처음으로 대은행의 실질적인 독점으로 전화시킴으로써 훨씬 밀접하고 능동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20세기 벽두는 낡은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자본주의로, 자본 일반의 지배에서 금융자본 지배로의 전환점을 이룬다.

 

 

3장 금융자본과 금융과두제

 

 

힐퍼딩은 이렇게 쓰고 있다. “산업자본 중에서, 그것을 운용하는 산업자본가가 소유하지 않은 자본의 비율은 꾸준히 증대하고 있다. 산업자본가는 오직 은행의 매개를 통해서만 자본을 사용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은행은 자본의 소유주를 대표하게 된다. 다른 한편 은행은 자기 자본의 더욱 더 많은 부분을 산업에 투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하여 은행은 점점 더 산업자본가로 전화된다. 이러한 은행자본, 즉 사실상 산업자본으로 전화되는 화폐형태의 자본을 나는 금융자본이라 부른다.” “금융자본이란 은행이 통제하고 산업자본가가 사용하는 자본을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한 가지 극히 중요한 사실, 즉 독점에 달했거나 달할 정도로 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증대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힐퍼딩은 그의 저술 전체를 통해서, 특히 위와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는 장의 바로 앞 두 장에서 자본주의적 독점체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생산의 집적, 이로부터 생겨나는 독점체, 은행과 산업의 합병 혹은 유착, 이러한 과정이 바로 금용자본의 발생사이며 금융자본이라는 개념의 내용이다.

 

우리는 이제 상품생산과 사적 소유라는 일반적 조건하에서 자본주의적 독점체의 사업활동이 어떻게 하여 금융과두제의 지배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가를 기술해야 한다. 우선, 주의할 점은 리써, 슐츠-게페르니츠, 리프만 등과 같은 독일독일뿐만은 아니지만부르주아 학자들은 모두 제국주의와 금융자본의 옹호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과두제 형성의 역학’, 그 수법, 과두제의 정당한 또는 부정한수입의 크기, 과두제와 의회의 관계 등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얼렁뚱땅 얼버무리고 있다. 이들은 이 성가신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을 거창하게 늘어놓아 은행 이사진의 책임감에 호소하거나, 프러시아 관리들의 의무감을 찬양하거나, 독점체의 감독규제에 관한 되지 않는 의회법안의 지엽적 내용을 진지하게 연구하거나, 나아가서 예컨대 리프만 교수가 도달한 다음과 같은 박학한정의 따위의 이론적 유희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상업이란 재화를 모으고 저장하고 공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직업이다”(뻔뻔스럽게도 교수 자신이 이 문장에 강조표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른다면 상업은 교환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원시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또한 사회주의에서도 존재하리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금융과두제의 가공할 지배와 관련된 가공할 사실들은 너무도 명명백백하기 때문에,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저술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본주의 나라, 즉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에서도 금융과두제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기술과 비판물론 그 본질은 쁘띠부르주아적이지만을 담은 많은 문한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미 앞에서 간략히 언급했던 지주제도이다. 이 제도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주의를 기울였던 독일의 경제학자 하이만은 그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콘체른 수뇌부는 주요회사[문자 그대로는 모회사’]를 통제하고, 모회사는 또 종속회사[‘자회사’]를 지배하며, 그 자회사는 다시 다른 종속회사[‘손회사’]를 지배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다지 많지 않은 자본으로도 광범한 생산영역을 지배할 수 있다. 사실상 하나의 회사를 통제하는 데 50%의 자본만 있으면 항상 충분하다고 할 때, 8백 단지 1백만 마르크만 있으면 손회사의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쇄가 더 확대된다면, 1백만 마르크를 가지고 1,600만 마르크, 3,200만 마르크 등등의 자본을 통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업무를 감독하기 위해서는 주식의 40%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분산되어 있는 소주주들의 상당한 부분은 사실상 주주총회 등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주식 소유를 민주화부르주아 궤변가와 기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여기에서 자본의 민주화를 기대한다(혹은 기대한다고 말한다)한다거나 소규모 생산의 역할과의 강화한다는 따위는 사실 금융과두제의 권력을 증강시키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덧붙여 말하면, 보다 선진적인 혹은 보다 오랜 역사와 많은 경험을 가진 자본주의 나라에서 소액면가 주식의 발행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1천 마르크 이하의 주식발행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독일 금융계의 거두들은 1파운드(20마르크, 10루블) 짜리 주식발행이 허용되는 영국을 부러워한다. 독일의 대산업가이자 금융왕중의 한 사람인 지멘스는 190067일 제국의회에서 “l파운드 짜리 주식이야말로 영국 제국주의의 토대이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상인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제국주의를 특정한 민족의 나쁜 습성 정도로만 여기는 어느 저술가에 비해 제국주의를 보다 깊이, 보다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주제도는 독점체의 권력을 엄청나게 증대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고 온갖 부끄럽고 더러운 술수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형식적으로 모회사의 간부들은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자회사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며, 따라서 자회사를 매개로 하여 모든 것을 짜낼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잡지 은행19145월 호에는 다음과 같은 실례가 나와 있다.

 

카셀에 있는 스프링 철강회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독일에서 가장 이윤율이 높은 기업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런데 부실한 경영으로 인해 그 회사의 배당율은 15%에서 0으로까지 떨어졌다. 나중에 드러난 일이지만, 이 회사는 주주들과 상의하지 않고, 공칭자본금이 겨우 수십만 마르크에 불과한 자회사의 하나인 하시아 회사에 6백만 마르크를 대부해 주었던 것이다. ‘모회사자본의 거의 3배에 달하는 이 대부는 모회사의 대차대조표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 이러한 누락은 법률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2년 동안이나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 것은 회사법의 어느 조항에도 저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허위 대차대조표에 책임자로서 서명했던 이사회 회장은 당시 카셀 상업회의소 의장이었으며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주주들이 하시아 회사에 대한 대부를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며, 그때는 이미 이 대부가 실패[이 글의 필자는 실패라는 말에 인용부호를 붙여야 한다]했다는 것이 판명되었던 때였고, 또한 속사정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이미 스프링 철강회사의 주식을 팔아치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주가가 거의 100% 까지 하락했던 때였다.……

 

주식회사에 있어 매우 흔한 대차대조표 사기의 이와 같은 전형적인 실례는 주식회사의 이사회가 왜 개별 사업가보다도 훨씬 부담 없이 위험한 거래에 기꺼이 뛰어드는가를 설명해 준다.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현대적 기법은 일반 주주의 눈으로부터 미심쩍은 사업을 은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뿐 아니라, 투기가 실패했을 경우에도 적시에 주식을 매각함으로써 주된 이해관계자가 투자 실패의 결과를 떠맡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준다. 반면 개별 기업가는 매사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대다수 주식회사의 대차대조표는 우리에게, 위에 덧쓰여 있는 글을 먼저 지워야만 그 아래에 본래의 의미를 가진 글이 나타나는 중세시대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를 연상시킨다”(팔림프세스트란 글자를 지우고 다시 그 위에 원래의 글자를 쓴 양피지 문서를 말한다).

 

대차대조표롤 해독할 수 없도록 만드는 가장 간단한, 따라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은 자회사를 설립하거나 합병함으로써 하나의 사업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 제도가 다양한 합법적 및 비합법적목적에 유용하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며, 이를 사용하지 않는 대회사는 예외에 속할 정도이다.”

 

이 글의 필자는 이러한 제도를 가장 광범하게 사용하고 있는 거대 독점회사의 예 로 유명한 AEG(Allgemeine Elektrizitats Gesellschaft ; 이 회사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를 들고 있다. 1912년 이 회사는 175~200개의 다른 회사 주식을 소유하고, 이들 회사를 지배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약 15억 마르크의 자본을 통제하고 있던 것으로 산정되었다.

 

선의의 교수나 관료들즉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미화하려는 선의에 젖어 있는 이들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규제법규라든가 대차대조표 공개, 일정한 양식에 따른 대차대조표 작성, 공개적 회계감사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은 신성한 것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주식의 구매·판매·교환·저당이 금지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대은행에 있어서 이러한 지주제도가 얼마나 발전했는가는 아가드가 제시한 자료로부터 판단할 수 있다. 그는 15년간 러시아-중국은행의 직원이었으며, 19145월에 대은행과 세계시장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한 바 있다. 이 저자는 러시아의 대은행을 두 개의 주요 그룹으로 나눈다. (a) ‘지주제도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은행. (b) ‘독립적은행(여기서 독립이라는 말은 외국 은행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의미로 독단적으로 해석되어 있다). 저자는 지주(持株)’와 지배에 참여하고 있는 외국 대은행의 국적에 따라, 첫 번째 그룹을 다시, 독일 지주, 영국 지주, 프랑스 지주라는 세 개의 하부 그룹으로 나눈다. 또한 저자는 은행자본을 생산적으로’(상업과 공업에) 투자된 자본과 투기적으로’(증권거래소나 금융활동에) 투자된 자본으로 나눈다. 그는 쁘띠부르주아개량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자본주의하에서 양자의 투자형태를 구분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후자의 형태를 폐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가 제시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P. 83의 표).

 

 

은행자산

 

(단위 : 백만 루블)

 

러시아 은행그룹

 

생산적으로

 

투자된 자본

 

투기적으로

 

투자된 자본

 

총계

 

(a)

 

 

 

413,7

 

859.1

 

1,272.8

 

4개 은행

 

시베리아상업은행

 

러시아은행

 

국제은행

 

할인은행

 

 

 

2개 은행 {

 

상공업은행

 

러시아-영국은행

 

239.3

 

169.1

 

408.4

 

 

 

711.8

 

661.2

 

1,373.0

 

5개 은행

 

러시아-아시아은행

 

페테르부르그사립은행

 

아조프-돈은행

 

모스크바합동은행

 

러시아-프랑스상업은행

 

 

 

(11개 은행)

 

1,364.8

 

1,689.4

 

3,054.2

 

(b)

 

 

 

504.2

 

391.1

 

859.3

 

8개 은행

 

모스크바상인은행

 

볼가-카마은행

 

융커회사은행

 

페테르부르그상업은행

 

(구 바벨베르그은행)

 

모스크바은행

 

(구 라이부신스키은행)

 

모스크바할인은행

 

모스크바상업은행

 

모스크바사립은행

 

 

 

(19개 은행) 총계

 

1,869.0

 

2,080.5

 

3,949.5

 

자료에 따르면, 대은행의 운영자본을 구성하는 약 40억 루블 중에서 3/4 이상, 30억 루블 이상이 외국은행, 주로 파리 은행(유명한 3대은행인 파리은행연합, 파리지방은행, 소시에떼 제네랄)과 베를린 은행(특히 도이치 은행과 디스콘토-게젤샤프트)의 사실상 자회사에 불과한 은행들의 소유이다. 2개의 러시아 거대은행인 러시아 은행(러시아 외국무역은행)과 인터내셔널 은행(페테르부르그 국제상업은행)1906~12년간 4,400만 루블에서 9,800만 루블로 자본금을 증대시키고, 적립금은 1,500만 루블에서 3,900만 루블로 증대시켰지만, ‘3/4은 독일자본이다.’ 러시아 은행은 베를린의 도이치 은행 콘체른에 속하며, 인터내셔널 은행은 베를린의 디스콘토-게젤샤프트에 속한다. 선량한 아가드는 대다수 주식을 베를린 은행들이 차지하고 있는 탓으로 러시아 주주들의 세력이 극히 미약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매우 분개한다. 당연히 알맹이는 자본수출국들의 몫이 된다. 예를 들면, 베를린의 도이치 은행은 시베리아 상업은행의 주식을 베를린 시장에 상장하지 않고 자기 은행의 금고 속에 l년 동안 보관했다가 이것을 100193의 비율로, 즉 액면가의 거의 2배로 팔아서 거의 600만 루블의 이윤힐퍼딩이 창업이윤(promoter’s profits)’이라 명명한 것올렸던것이다.

 

이 저자는 페테르부르그 주요 은행들의 총 능력80억 루블을 훨씬 상회하는 823,500만 루블로 보고, 외국은행의 지주’,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지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프랑스 55%, 영국 은행 10%, 독일 은행 35%. 그리고 그의 계산에 따르면 823,500만 루블 중 40%가 넘는 368,700만 루블이 프로두골·프로다메트 신디케이트, 그리고 석유산업, 야금산업, 시멘트산업 신디케이트의 수중에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척 독점체가 형성됨으로써 러시아에서도 역시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융합이 엄청나게 진전되었다.

 

손에 집적되어 사실상의 독점을 형성하고 있는 금융자본은 회사 설립, 유가증권 발행, 국채 등을 통하여 점점 늘어나는 막대한 이윤을 얻으며, 금융과두제의 지배를 강화하고, 전체 사회로부터 공물을 징발하여 독점체를 살찌운다. 다음은 힐퍼딩이 인용 한 미국 트러스트의 사업방식에서 무수히 볼 수 있는 사례 중 하나이다. 1887년에 하브메이어는 15개의 소규모 회사를 합동함으로써 총자본 650만 달러에 달하는 제당트러스트를 창설했다. 이 트러스트의 자본은 미국식으로 표현하면 적당히 물을 먹여’ 5,000만 달러로 불어난 것으로 발표되었다. 유나이티드 철강회사가 독점이윤을 기대하여 가능한 한 많은 철광산을 매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과도자본화는 독점이윤을 기대한 것이었다. 실제로 제당 트러스트는 독점가격을 설정하여 막대한 이윤을 획득했으며, 7배로 물을 먹인자본에 대해서는 10%의 배당, 트러스트 창설 당시 에 실제로 투자된 자본에 대해서는 약 70%의 배당을 지불할 수 있었다! 1909년에 제당트러스트의 자본은 9,000만 달러에 달했다. 결국 22년 동안에 제당트러스트는 자본을 10배 이상 증가시켰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금융과두제의 지배(프랑스 금융과두제에 대항하여는 리시가 저술한 유명한 책의 제목으로, 1908년에 제5판이 출간되었다)는 그 형태만 약간 다를 뿐이다. 유가증권의 발행에 있어 4개의 거대은행은 상대적 독점이 아닌 절대적 독점을 향유한다. 사실상 이것은 대은행들의 트러스트이다. 그리고 독점은 증권 발행에 따르는 독점이윤을 보장한다. 대개 채무국은 차관 총액의 90% 밖에 받지 못하고, 나머지 10%는 은행 및 기타 중개자에게 돌아간다. 러시아-중국 은행이 들여온 4억 프랑의 차관 중에서 은행이 취한 이윤은 8%에 달했으며, 러시아 은행의 차관(1904) 8억 프랑에서 은행의 이윤은 10%, 또 모로코 은행의 차관(1904) 6,250만 프랑에서는 무려 18.75% 에 달했다. 소규모의 고리대자본에서부터 발전을 시작했던 자본주의는 거대한 고리대자본으로서 그 발전을 마치고 있는 것이다. 리시는, “프랑스인은 유럽의 고리대금업자이다고 말한다. 경제생활의 모든 조건은 자본주의의 이러한 전환에 의해 심각하게 변형되고 있다. 인구·공업·상업·해운업이 정체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나라는 고리대로 얼마든지 부유해질 수 있다. “8백만 프랑의 자본을 대표하는 50명의 사람들이 4개 은행에 예치된 20억 프랑을 통제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이미 친숙해진 지주제도도 이와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최대급 은행의 하나인 소시에떼 제네랄은 자산의 자회사인 이집트 제당 회사를 위해 64천 주의 회사채를 발행한다. 회사채는 액면가의 150%로 발행되며, 따라서 은행은 1프랑 당 50상팀의 이익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의 배당은 가공의 것임이 밝혀졌으며, ‘대중9천만 내지 1억 프랑의 손해를 보았다. “소시에떼 제네랄의 이사 중 한 사람은 그 제당회사의 중역이었다.” 그러므로 위 저자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공화국은 금융군주국이며”, “금융과두제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고, 그것은 언론 및 정부도 지배하고 있다.”

 

금융자본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인 유가증권 발행에서 생기는 특별히 높은 이윤율은 금융과두제의 발전과 강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은행지는 이렇게 말한다. “외국에 차관을 공여함으로써 얻는 이윤과 대략이나마 맞먹을 수 있는 이윤을 가져다주는 사업은 국내에 단 하나도 없다.”

 

유가증권 발행에서 생기는 것만큼 높은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은행업무는 없다!” 도이치 에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산업 증권의 발행에서 생기는 연간 평균이윤은 다음과 같다.

 

(단위 : %)

 

1895

 

38.6

 

1898

 

67.7

 

1896

 

36.1

 

1899

 

66.9

 

1897

 

66.7

 

1900

 

55.2

 

 

“1891~1900년의 10년간 독일 산업 증권의 발행에서 얻은 수익은 10억 마르크 이상이었다.”

 

산업적 호황기에 금융자본의 이윤은 막대하다. 그러나 불황기가 되면 견실하지 못한 소규모 기업들이 도산하며, 대은행들은 이들 기업을 헐값으로 매입하여 소유하거나 이들 기업을 재구성(reconstruction)’하고 재조직(reorganisation)’하는 수익성 높은 작업에 참여한다. 부실기업을 재구성할 때, “주식자본은 감가 된다. 즉 이윤은 보다 작아진 자본에 대해서 분배되며, 이후에도 이를 기초로 하여 계산된다. 만약 수입이 0으로 떨어질 경우에는 새로운 자본이 투자되고, 이 자본은 보다 수익성이 낮은 기존의 자본과 결합하여 다시 적절한 이윤을 낳을 것이다.” 힐퍼딩은 이렇게 덧붙인다. “이러한 모든 재조직과 재구성은 은행에 있어서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는 수익성이 높은 거래로서, 둘째로는 곤경에 처한 회사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기회로서의 의미이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도르트문트의 유니언 광산회사는 1872년에 창립되었다. 이 회사는 대략 4,000만 마르크의 주식자본을 발행하였으며, 첫해에 12%의 배당금을 지불한 이후 주가는 170%까지 올랐다. 금융자본은 알맹이를 모두 챙겼어도 약 2, 800만 마르크 정도의 별로 대단치 않은 수입을 올렸다. 이 회사의 주요 후원자는 이미 자본금 3억 마르크에 이르는 데 성공한 저 독일 의 거대은행 디스콘토-게젤샤프트였다. 이후 유니언 회사의 배당금은 점점 감소하여 한 푼도 없어졌다. 그래서 주주들은 자본의 감가, 즉 전부를 잃지 않기 위해 일부를 잃는 데 동의해야 했다. 이리하여 몇 차례의 재구성이 있은 후, 30년 동안 유니언 회사의 장부에서는 7,300만 마르크 이상의 금액이 사라져 버렸다. “현재 이 회사 최초의 주주들은 주식 액면가의 단지 5%만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은행은 재구성이 있을 때마다 무언가를 벌어들였던것이다.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대도시의 교외지역에 대한 토지투기도 금융자본에게 특별히 높은 이윤을 가져다주는 사업이다. 이 경우 은행독점은 지대(地貸)의 독점 및 교통수단의 독점과 결합한다. 왜냐하면 지가를 올리거나 토지를 수익성 있게 분양할 수 있는 가능성 따위는 주로 도시 중심부와 연결해 주는 교통수단의 편의 여부에 달려있는데, 이들 교통수단은 지주제도나 이사직의 분배 등을 통하여 바로 이들 대은행과 결합하고 있는 대회사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은행지의 기고자이며 토지매매와 저당 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독일 저술가 에슈베게(L. Eschwege)수렁 (bog)’이라 이름 지은 현상이 나타난다, 교외의 건물부지에 대한 광적인 투기로 인해 예컨대 베를린의 보스바우와 크나우어 회사와 같은 건설회사가 붕괴한다 하더라도, 이들은 견실하고 튼튼한도이치 은행의 도움으로 1억 마르크나 손에 수 있으며물론 도이치 은행은 지주제도를 통해, 족 무대 뒷편에서 은밀히 활동했다단지’ 1,200만 마르크의 손실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사기꾼 건설회사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그리고 토지에 관한 정보나 건축허가 등등을 입수하기 위해 정직한베를린 경찰이나 행정당국과 접촉할 수 없는 많은 소경영주와 노동자들은 파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럽의 교수들이나 양심적 부르주아지들이 그토록 위선적으로 개탄해 마지않는 그러한 미국식 윤리는 이미 문자 그대로 모든 나라 모든 대도시의 윤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1914년 초 베를린에서는 운송트러스트’, 즉 베를린의 3개 운송 업체인 시가전철, 궤도철도, 버스회사 간에 이해공동체가 형성되리라는 소문이 있었다. 당시 은행지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버스회사의 주식 대부분이 다른 두 운송회사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부터, 이러한 계획이 시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내세우고 있는 바와 같이 운송업무를 통합함으로써 절약이 가능하며, 그 이익의 일부분은 결국 공적인 이익이 되리라는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형성 중에 있는 운송트러스트의 배후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운송수단을 자신들의 부동산업에 대한 이해에 종속시킬 수 있는 은행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이러한 추측이 당연하다는 것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전철회사가 설립될 때 이미 이를 장려한 대은행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된다. 즉 이 운송사업의 이해는 부동산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철의 동부선은 이후 철도부설이 확정되었을 때 은행 및 몇몇 거래 관계자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면서 매각된 바로 그 토지를 가로지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독점은 일단 형성되어 수십억의 자본을 지배하게 되면, 정부형태라든가 다른 모든 세세한 문제에 관계없이 모든 생활영역에 침투한다. 독일의 경제문헌에서는 흔히 프랑스-파나마 스캔들이나 미국의 정치적 부패에 빗대어 프러시아 관리의 청렴성에 대한 아부에 가까운 찬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부르주아 문헌들조차 독일 은행문제를 다루려면 순수한 은행업무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논의를 전개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 문헌은 공직관리들이 은행으로 옮겨가는 일이 점점 빈번해지는 것과 관련하여 은행의 매력에 대해 다음과 언급하고 있다. “마음은 베렌가()의 푹신한 의자에 가 있는 국가관리의 청렴성이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베렌가는 도이치 은행 본점이 위치해 있는 베를린의 거리이다). 은행지의 발행인인 알프레트 란스부르그는 1909년에 비잔티니즘의 경제적 의미라는 제하의 글에서 빌헬름 II세의 팔레스타인 방문을 약간 언급하는 가운데 이렇게 썼다. “이 방문의 직접적인 결과인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은 포위에 대해, 우리의 정치적 실수를 합친 것보다 더욱 큰 책임이 있는 저 저주스러운 독일 기업의 위대한 생산물이었다,”(여기서 포위라는 말은 독일을 고립시키고 제국주의적 반독일동맹으로 포위하려 한 에드워드 VII세의 정책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한 은행지 기고가 에슈베게는 1911년에 금권정치와 관리라는 기사에서 ?커라는 한 독일관리의 사진을 폭로하고 있다. ?커는 카르텔위원회의 열성적언 위원으로, 나중에는 최대의 카르텔일 철강신디케이트에서 높은 직위까지 오른 인물이다. 결코 우연적아라 할 수 없는 이와 유사한 사건들로 인해 이 부르주아 저술가는, “독일헌법에 보장된 경제적 자유는 많은 경제생활 분야에서 이미 공문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 그리고 금권정치의 지배가 확립된 곳에서는 아무리 광범위한 정치적 자유가 있다 해도 우리는 사실상 자유 없는 나라로 빠져드는 것을 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한 가지 실례를 드는 것으로 그치겠다. 몇 년 전에 모든 신문은 일제히 재무성 신용국장 다비도프가 수년에 걸쳐 백만 루블 이상의 봉급을 받는다는 계약으로 어느 대은행의 직책을 맡기 위해 신용국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보도했다. 신용국은 전국의 모든 신용기관의 활동을 조정하는것을 그 임무로 하며, 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 있는 은행들에게 8억 루블에서 10억 루블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관청이다.

 

자본의 소유가 자본의 생산적 투자와 분리되는 것, 화폐자본이 산업자본 또는 생산적 자본과 분리되는 것, 화폐자본으로부터 나오는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생활하는 금리생활자가 기업가 및 기타 자본경영에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사람들과 분리되는 것, 이것들은 자본주의의 일반적 특성이다. 제국주의, 혹은 금융자본의 지배란 곧 그러한 분리가 상당한 정도에 이른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이다. 다른 모든 형태의 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우위는 곧 금리생활자와 금융과두제의 지배를 의미하며, 금융적으로 강력한몇몇 국가가 나머지 다른 모든 국가 위에 우뚝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이 얼마나 진전했는가는 모든 종류의 유가증권 발행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국제통계연구소 정기보고서에서 네이마르크는 전세계 유가 증권 발행에 관한 매우 상세하고 완벽한, 또 비교가능한 자료를 발표하였는데, 이 자료는 이후의 경제문헌에서 부분적으로 계속 인용되고 었다. 다음 표는 그가 제시한 40년 동안의 총계이다(P. 91의 표).

 

 

10년간 증권발행액

 

(단위 : 억 프랑)

 

연 도

 

발행액

 

1871-1880

 

1881-1890

 

1891-1900

 

1901-1910

 

761

 

645

 

1,004

 

1,978

 

 

1870년대에는 보불전쟁과 관련되어 발행된 여러 가지 공채 및 전후 독일의 회사설립 붐으로 인해 전세계의 유가증권 발행고는 특히 높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19세기 후반의 30년 동안 비교적 그다지 급속한 증가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20세기 초 10년간 비로소 현저하게 증가하여 발행고가 약 2배까지 높아졌다. 이와 같이 20세기 초는 우리가 이미 언급했던 독점체(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의 성장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금융자본의 성장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전환기이다.

 

네이마르크는 1910년에 전세계에서 유통되는 유가증권 총액을 약 8,150억 프랑으로 계산하고 있다. 이 총액에서 이중으로 계산된 액수를 어림잡아 공제한 결과, 그는 5,750~6,000억 프랑이라는 액수를 제시한다(나는 6,000억 프랑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총액의 나라별 분포는 다음과 같다(P. 92의 표).

 

 

1910년대 유통되고 있는 금융증권 총액

 

(단위 : 억 프랑)

 

 

 

 

영국

 

미국

 

프랑스

 

1.420

 

1.320

 

1.110

 

4,790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루마니아 등

 

950

 

310

 

240

 

140

 

120

 

125

 

75

 

75

 

62.5

 

37.5

 

25

 

 

 

6,000

 

 

이 표에서 우리는 각기 1,000~1,500억 프랑의 유가증권을 소유하는 4개의 부유한 자본주의 나라들을 즉시 발견하게 된다. 이들 4개국 중에서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가장 오랜 자본주의 나라들이며, 나중에 보겠지만 가장 많은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다. 또한 다른 두 나라인 미국과 독일은 발전하는 속도 및 자본주의적 독점체가 산업에 확산되는 정도에 있어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자본주의 나라들이다. 이들 4개국은 모두 4,790억 프랑, 즉 전세계 금융자본의 거의 80%를 소유하고 있다.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 거의 대부분은 어떠한 형태로든, 국제적 은행가이자 세계 금융자본의 4기둥인 이들 나라에 대한 채무자이며 공납자인 것이다.

 

여기서, 금융자본의 국제적 종속망 및 연결망을 형성하는 데 있어 자본수출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검토는 특히 중요하다.

 

4장 자본수출

 

 

전적으로 자유경쟁이 지배적이었던 구 자본주의의 전형은 상품수출이었다. 그러나 독점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최근단계의 전형은 자본수출이다.

 

자본주의는 노동력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되는 상품생산의 발전 단계이다. 국내교역, 특히 국제교역의 성장은 자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자본주의체제하에서 개별 기업, 개별 산업부문, 개별 나라의 발전에 있어 불균등성과 불규칙성은 불가피하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먼저 자본주의 나라가 된 영국은 19세기 중엽 자유무역을 채택하여 세계의 공장’, 즉 모든 나리에 대한 공산품 공급자라는 역할을 선언하였고, 다른 나라들은 공산품과 교환하기 위해 영국에 원료를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보호관세로 자신들을 방어하면서 독립적인 자본주의국가로 발전해 감에 따라 19세기 후반 그러한 독점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독점이 형성되는 것을 보게 된다. 첫째로, 자본주의가 발전한 모든 나라에서 자본가의 독점단체들이 형성되었으며, 둘째로 자본의 축적이 엄청난 규모에 달한 소수의 극히 부유한 나라들이 독점적 위치를 갖게 되었다. 선진국에는 막대한 과잉자본이 생겨났다.

 

만약 자본주의가 오늘날 어디에서나 공업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져 있는 농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또한 놀라운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나 여전히 반기아상태의 빈곤에 허덕이는 대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물론 자본의 과잉이라는 문제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쁘띠 부르주아적 비판가들이 흔히 개진해 왔다. 그러나 만약 자본주의 그러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발전의 불균등성이나 대중의 반기아적인 생활수준은 모두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근본적이고 불가결한 조건이며, 그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로서 존재하는 한 과잉자본은 그 나라 대중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자본가들의 이윤은 하락할 것이므로후진국에 자본을 수출함으로써 이윤을 높이는 데 이용된다. 일반적으로 이들 후진국에서는 자본이 희소하고, 토지가격이 비교적 낮으며, 임금이 낮고, 원료가 싸기 때문에 이윤이 높다. 자본수출은 수많은 후진국들이 이미 세계 자본주의적 교역에 편입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해진다. 즉 이들 나라에서는 간선철도가 개통되었거나 건설중에 있으며, 기타 산업발전을 위한 초보적 조건이 창출되고 있다. 또한 자본수출의 필요성은 몇몇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과잉성숙되어 있으며, (농업의 후진성과 대중의 빈곤으로 인해) ‘유리한투자영역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도 나온다.

 

다음은 3대 주요국이 외국에 투자한 자본의 양을 보여주는 대략적인 수치이다.

 

 

국외투자자본

 

(단위 : 억 프랑)

 

 

영 국

 

프랑스

 

독 일

 

1862

 

1872

 

1882

 

1893

 

1902

 

1914

 

36

 

150

 

220

 

420

 

620

 

750~1,000

 

 

100(1869)

 

150(1880)

 

200(1890)

 

270~370

 

60

 

 

 

?

 

?

 

125

 

440

 

 

이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수출은 20세기 초에 비로소 막대한 양에 달했다. 전쟁 전 3대 주요국이 외국에 투자한 자본은 1,750억 내지 2,000억 프랑에 달했다. 적게 잡아 연리 5%로 계산해도, 이 총액으로부터의 수익은 해마다 80~100억 프랑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곧 세계의 대다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적 억압과 착취의 토대이며, 한 줌밖에 안 되는 부유한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기생성의 토대인 것이다!

 

그러면 외국에 투자된 이 자본은 여러 나라들 간에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가? 또한 그 자본은 어디에 투자되는가?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답변밖에 할 수 없지만, 이것은 현대 제국주의의 몇 가지 일반적인 관계와 연관을 보여주는 데 충분할 것이다.

 

 

국외자본의 지역별 분포 (근사치, 1910년경)

 

(단위 : 억 마르크)

 

 

영국

 

프랑스

 

독일

 

 

유 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40

 

370

 

290

 

230

 

40

 

80

 

180

 

100

 

70

 

450

 

510

 

440

 

 

700

 

350

 

350

 

1,400

 

 

영국 자본의 주된 투자 지역은 영국 식민지로서, 이들은 아시아 등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메리카대륙(예를 들면 캐나다)에도 광대하게 퍼져 있다. 이처럼 영국의 경우는 막대한 자본수출이 광대한 식민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제국주의에 있어 식민지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프랑스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프랑스의 자본수출은 주로 유럽, 그 중에서도 러시아(적어도 100억 프랑)에 투자되어 있다. 더구나 그것은 치관자본으로서 국채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산업체에 투자된 자본은 아니다. 영국의 식민지 제국주의와 구별하여 이 같은 프랑스 제국주의는 고리대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다. 독일의 경우는 또 다른 형태이다. 식민지는 얼마 되지 않으며, 외국에 투자된 독일 자본은 유럽과 아메리카대륙에 거의 비슷하게 배분되어 있다.

 

자본수출은 그것을 수입하는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그 발전을 크게 가속화시킨다. 그러므로 자본수출이 자본수출국의 발전을 어느 정도 정체시키는 경향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동시에 전세계에 걸친 자본주의 발전을 더욱 확대·심화하는 것이다.

 

자본수출국은 거의 항상 일정한 이점을 얻을 수 있는 바, 그것의 성격은 금융자본과 독점이 지배하는 시대의 특성을 드러내준다. 191310월 베를린의 은행지에 나온 글을 인용해 보자.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 견줄 만한 사건이 최근 국제자본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스페인에서 발칸까지, 러시아에서 아르헨티나·브라질·중국에까지 이르는 수많은 나라들이 차관을 요구하며이 가운데는 매우 끈질긴 것도 있다공공연히 혹은 은밀히 대금융시장에 나타나고 있다. 현재로서 금융시장은 활기 있는 상태도 아니며, 정치적 전망도 그다지 밝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접국이 앞질러 외국의 차관대부에 응하고, 그리하여 모종의 호혜적인 반대급부를 확보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어떠한 금융시장도 감히 차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국제거래에서 채권자는 거의 항상 무엇인가 별도의 이익, 예컨대 통상조약에서의 유리한 조항이라든가, 석탄기지, 항만 건설 계약, 실팍한 이권, 총포의 주문 등을 확보하게 된다.”

 

금융자본은 독점의 시대를 열었으며, 독점은 모든 곳에 독점적 원리를 도입한다. 즉 공개시장에서의 경쟁 대신 유리한 거래를 위해 모든 연관을 이용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공여된 차관의 일부를 채권국으로부터의 구매, 특히 군수품이나 선박 등의 구입에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최근 20년 간(1890~1910) 이 방법을 매우 자주 사용했다. 이와 같이 자본수출은 다시 상품수출을 촉진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이 경우 특히 큰 기업들 간에 이루어지는 거래는 쉴더의 점잖은표현에 따르면 실제로는 뇌물수수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독일의 크루프, 프랑스의 슈나이더, 영국의 암스트롱은 막강한 은행 및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예로서, 차관을 체결할 때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대표적인 회사들이다.

 

프랑스는 1905916일 러시아와 통상조약에서 차관을 제공할 때 러시아에 압력을 가해 1917년까지 유효한 몇 가지 양보를 얻어 냈다. 1911819일 일본과의 통상조약에서도 프랑스는 똑같은 일을 했다. 7개월간의 중단지간을 제외하고는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줄곧 계속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관세전쟁은 부분적으로는 세르비아에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문제를 놓고 경쟁하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 19121월 폴 데샤넬은 하원의회에서, 1908년부터 1911년까지 프랑스 회사들은 세르비아에 4,500만 프랑의 전쟁물자를 공급했다고 진술했다.

 

상파울로(브라질)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영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브라질 철도는 대부분 프랑스·벨기에·영국·독일 자본에 의해 건설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나라는 철도건설과 관련된 금융거래를 통해 각기 자기 나라가 건설자재를 공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금융자본은 문자 그대로 전세계 모든 나라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식민지에 설립된 은행 및 그 지점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일 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면에서 특히 성공식민지 소유국들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1904년에 영국은 2,279개의 지점을 가진 50개의 식민지 은행을 소유하고 있었고(1910년에는 5.449개의 지점을 가진 20개의 은행으로 늘어났다), 프랑스는 136개의 지점을 가진 20개의 은행, 네덜란드는 68개의 지점을 가진 16개의 은행을 소유하고 있었던 반면, 독일은 불과’ 70개의 지점을 가진 13개의 은행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또 미국 자본가들도 그들 나름대로 영국과 독일 자본가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1915년에 그들은 이렇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남미에서는 5개의 독일 은행이 40개의 지점을, 5개의 영국 은행이 70개의 지점을 갖고 있다.……영국과 독일은 최근 25년간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에 약 40억 달러를 투자했으며, 그 결과 그들은 이 3개국 총 무역액의 46%를 장악하고 있다.”

 

자본수출국들은 은유적인 의미에서 자기들 간에 세계를 분할했다. 그러나 금융자본은 세계를 실제로 분할한 것이다.

 

5장 자본가단체들 간의 세계분할

 

 

독점자본가의 단체인 카르텔·신다케이트·트러스트는 먼저 국내시장을 자가들끼리 분할함으로써 자기 나라의 산업을 거의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 국내시장은 필연적으로 외국 시장과 연결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이미 오래 전에 세계시장을 형성했다. 자본수출이 늘어나고 대독점 연합체들의 대외적·식민지적 관계망과 세력권이 확장됨에 따라, 사태는 자연스레이들 독점단체들 간의 연합적 협정으로, 즉 국제카르텔의 형성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이전 단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된 단계로서, 자본과 생산의 세계적 집적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단계이다. 이제 이러한 초독점(super monopoly)이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살펴보자.

 

전기산업은 최근 기술발전의 전형이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자본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산업이다. 이 산업은 신흥 자본주의 나라 가운데 가장 앞선 두 나라인 미국과 독일에서 특히 발전했다. 독일의 경우 전기산업의 접적을 특히 강력하게 추진시켰던 것은 1900년 공황이었다. 당시 이미 산업과 매우 밀접하게 유착되어 있었던 은행은 공황기 동안 비교적 규모가 작은 기업들의 몰락과 대기업에 의한 이들 기업의 흡수를 극도로 가속화하고 강화했다. 야이델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은행은 절박한 자본의 필요를 느끼고 있는 기업들에게는 오히려 도움을 주지 않았으며, 처음 에 광적인 호경기를 조성하고는 그 다음에 은행과 밀접히 연결되지 않은 회사들을 절망적으로 파산시켰다.”

 

그 결과 1900년 이후 독일에서는 엄청나게 접적이 진전되었다. 1900년 이전에 전기산업에는 7~8개의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각기 몇 개의 회사로 구성되어 있었으며(총계 28), 각기 2~11개 은행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1908년에서 1912년 사이에 이들 모든 그룹들은 합병하여 둘, 아니 하나가 되었다. 그 과정은 아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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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방식으로 성장한 유명한 AEG(‘지주제도를 통해) 175~200개 회사를 통제하며, 총 자본은 약 15억 마르크에 달한다. 이 회사는 직접적인 국외지사만도 10개 이상의 나라에 34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 12개는 주식회사이다. 이미 1904년에 독일 전기산업이 외국에 투자한 자본은 23,300만 마르크에 달했으며, 그 중 6, 200만 마르크는 러시아에 투자되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AEG는 케이블과 애자에서부터 자동차나 비행기까지 극히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제조회사만도 16개에 이르는거대한 기업합동이다.

 

그러나 다음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유럽에서의 집적은 또한 미국에서의 접적과정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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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2개의 강력한 전기열강이 형성되었다. 하이니히(Heinig)는 그의 논문 전기트러스트의 전망에서, “이들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전기회사는 아무 데도 없다고 쓰고 있다. 아래의 수치는 결코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들 두 트러스트의 총 매상고와 경영규모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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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07년에 독일 트러스트와 미국 트러스트는 자기들 간에 세계를 분할하는 협정을 맺었다. 그들 간의 경쟁은 종식되었다. 미국의 GEC(General Electric Company)는 미국과 캐나다를 차지했고, 독일의 GEC(AEG)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네덜란드, 덴마크, 스위스, 터키, 발칸을 차지했다. 그리고 새로운 산업부문이나 아직 분할되지 않은 새로운나라들에 자회사를 침투시키는 경우에 관한 특별 협정물론 비밀스러운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발명과 실험은 상호 교환하도록 약속하였다.

 

수십억의 자본을 주무르며 세계 구석구석에 지점·대리점·대표·연고 등등을 갖고 있는 사실상 단일한 이 세계적 트러스트와의 경쟁이 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발전의 불균등성·전쟁·파산 등의 결과로 세력관계가 변화할 경우, 이 두강 력한 트러스트 사이의 세계분할은 재분할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한 재분할을 위한 시도, 재분할을 위한 투쟁의 한 교훈적인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 석유산업이다.

 

야이델스는 1905년에 이렇게 썼다. “세계 석유시장은 오늘날에도 역시 두 개의 거대 금융그룹미국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 회사와, 러시아 바쿠 유전의 지배자인 로스차일드와 노벨에게 분할되어 있다. 이 두 그룹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들의 독점은 몇 년 전부터 5가지 적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5가지 적이란, 미국 유전의 고갈, 바쿠에서의 경쟁사인 만타셰프 상사, 오스트리아 유전, 루마니아 유전, 해외 유전, 특히 네덜란드 식민지의 유전(매우 부유하며 또 영국 자본과도 연결되어 있는 사뮤엘 상사와 셀 상사)이다. 뒤의 세 그룹은 거대한 도이치 은행을 필두로 하는 독일 대은행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 은행은 자신의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루마니아 등지에서 석유산업을 독자적이고 체계적으로 발달시켰다. 1907년 루마니아의 석유산업에 투자된 외국자본은 총 18,500만 프랑으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7,400만 프랑이 독일 자본이었다.

 

경제문헌에서 세계의 분할을 위한 투쟁이라 부르는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에서, 모든 것을 장악하고자 하는 록펠러의 석유트러스트는 자선의 주요 적인 앵글로-더치 셸트러스트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바로 네덜란드 국내에 자회사를 설립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유전을 매입했다. 다른 한편에서, 도이치 은행을 비롯한 독일 은행들은 루마니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록펠러에 대항하여 루마니아와 러시아를 연합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록펠러 측이 훨씬 많은 자본과 뛰어난 석유 수송·분배체계 갖추고 있었으므로, 이 투쟁은 도이치 은행의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었으며 실제로 1907년에 그렇게 끝났다. 이에 따라 도이치 은행 자신의 석유 이권을 포기하고 수백만금을 잃든가 아니면 항복하든가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도이치 은행은 결국 항복을 선택했으며, 미국의 석유트러스트와 매우 불리한 협정체결을 감수해야 했다. 그것은 곧 미국의 이익을 해칠 수 있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협정이었다. 그렇지만 이 협정에는 독일에서 석유 국가독점(전매)이 확립될 경우 그 효력을 잃는다는 규정이 삽입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석유의 희극이 시작되었다. 독일 금융왕 중의 한 사람이며 도이치 은행의 이사인 폰 그빈너는 그의 비서인 스타우스를 통해 석유 국가독점을 위한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독일 최대 은행의 방대한 기구와 모든 광범한 연관들이 동원되었으며, 신문은 미국 트러스트의 멍에에 대해 애국적분노를 터뜨렸다. 마침내 제국의회는 1911315일 거의 만장일치로 석유 독점의 확립을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정부는 이 인기 있는안건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미국측 협상자를 기만하면서 국가독점을 통해 자가 사업을 회복시키려 했던 도이치 은행의 도박은 멋지게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독일의 석유거두들은 벌써부터 러시아 제당업자의 이윤에 못지않은 엄청난 이윤을 눈앞에 그려보고 있었다.……그러나 첫째, 전리품의 분배를 놓고 독일의 거대은행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하여, 디스콘토-게젤샤프트가 도이치 은행의 탐욕스런 목적을 폭로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정부는 록펠러와의 투쟁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록펠러의 손을 거치지 않고 과연 독일이 석유를 입수할 수 있을 것인가가 금화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루마니아의 석유생산량은 소규모였다). 셋째, 1913년 바로 그때 독일은 전쟁준비를 위해 10억 마르크의 대부를 결정해 놓고 있었다. 이리하여 석유독점체 설립안은 연기되었다. 그리고 록펠러 석유트러스트는 당분간 투쟁의 승리자가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베를린의 은행지는, 전력 독점을 확립하고 수력으로부터 값싼 전력을 만들어 내지 않고서는 석유트러스트와 싸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글의 필자는 뒤이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전력의 독점은 전력의 생산자들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에만 이루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전기산업의 대규모 도산이 또 다시 임박해 올 때, 그리고 이미 도시나 정부로부터 특별구역을 얻어내고 있는 사적 전력콘체른들이 많은 비용을 들여 현재 곳곳에 건설 중인 값비싼 대규모 발전소들이 이제 더 이상 이윤에 따라 움직이지 않게 될 때에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력을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재정으로는 값싼 수력전기를 얻을 수 것이며, 그 작업은 다시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사적 독점에 양도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사적 산업은 이미 허다한 계약을 맺었고, 거액의 보상금을 약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질산염 독점도 그러하였으며, 석유 독점도 그러하다. 그리고 전력 독점도 그러할 것이다. 이때야말로 아름다운 원칙에 푹 빠져 있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이 마침내, 독일의 독점정책은 결코 소비자들에게 이익을 주거나 아니면 국가에게 창업이윤의 일부라도 넘겨주려는 목적을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그러한 결과를 빚어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들은 단지 파산 직전에 있는 사기업을 국가의 비용으로 구제해 왔을 뿐이다.”

 

해운업에서도 접적의 엄청난 발전으로 세계분할아 이루어졌다. 독일에서는 2개의 강력한 회사가 전면에 부상했다. 그것들은 함부르크-아메리카 회사와 북부독일 로이 드 회사로서, 이들은 각각 2억 마르크의 자본(주식과 회사채)18,500~18, 900만 마르크 상당의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미국에서는 190311 일 혼히 모르간 트러스트로 알려진 국제상선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미국과 영국의 9개 해운회사를 합병하여, 12,000만 달러(48,000만 마르크)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미 1903년에 독일의 거대회사와 이 미국-영국 트러스트는 이윤 분배와 관련된 세계분할 협정을 맺었다. 독일 회사는 미국-영국 항로에서 경쟁하지 않기로 했다. 이들은 어느 항구가 어느 회사에게 할당되는가를 엄밀하게 규정하였으며, 공동통제위원회까지 설치하였다. 이 협정의 유효기간은 20년으로 결정되었으며, 전쟁 발생 시에는 효력을 상실한다는 반틈 없는 조항까지 덧붙였다.

 

국제 철도카르텔의 성립과정 또한 대단히 교훈적이다. 영국·벨기에·독일의 철도 제조업자들이 이러한 카르텔을 형성하고자 최초로 시도했던 것은 일직이 1884년의 심각한 산업불황기였다. 제조업자들은 협정에 참가한 나라의 국내시장에서는 서로 경쟁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외국시장을 영국 66%, 독일 27%, 벨기에 7%의 비율로 분할했다. 인도는 전적으로 영국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카르텔에 참여하지 않은 어느 영국 회사에 대해 공동으로 선전포고했으며, 이 전쟁에 드는 비용은 판매되는 모든 제품에 일정비율로 매겨져서 조달되었다. 그러나 이 카르텔은 1886년에 영국의 두 회사가 탈퇴함으로써 붕괴되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그 후에 이어진 호황기에는 협정이 맺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1904년 초에는 독일 철강신디케이트가 형성되었다. 190411월에는 국제 철도카르텔이 다시 부활되었으며, 영국이 53.5%, 독일이 28.83%, 벨기에가 17.67%의 비율로 정해졌다. 후에 프랑스가 가입하여 첫해에는 4.8%, 다음 해에는 5.8%, 그 다음 해에는 6.4%를 각각 할당받음으로써 총 비용은 104.8%가 되어 100%를 넘어서게 되었다. 1905년에는 미국의 유나이티드 철강회사가 이 카르텔에 가입했고, 그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와 스페인도 가입했다. 포겔슈타인은 1910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 세계의 분할은 완료되어 있다. 국유철도는그들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세계가 이미 나누어졌으므로이제 주피터의 천국에서 사는 시인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국제 아연신다케이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1909년에 설립된 이 신디케이트는 독일·벨기에·프랑스·스페인·영국의 5개국 공장 그룹들에게 아연 생산량을 정밀하게 배분했다. 또 국제 다이너마이트트러스트도 있는데, 이에 대해 리프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독일의 모든 폭약 제조업자들의 매우 현대적이고 긴밀한 동맹으로서, 그들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프랑스 및 미국의 다이너마이트 제조업자들과 결합하여, 말하자면 자기들끼리 전세계를 분할했다.”

 

리프만은 독일이 참가한 국제카르텔이 1897년에는 합계 약 40, 1910년에는 약 100개에 이른 것으로 계산했다. 일부 부르주아 저술가들(예를 들어 1909년만 해도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칼 카우츠키도 이제는 이를 완전히 버리고 여기에 가담했다)의 견해에 따르면, 국제카르텔은 자본국제화의 가장 두드러진 한 표현이며, 자본주의하에 있는 민족들에게 평화의 희망을 준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견해는 완전히 불합리하며, 실천적으로는 궤변이자 가장 사악한 기회주의에 대한 부당한 방어이다. 국제카르텔은 자본주의적 독점체가 현재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다양한 자본가단체들이 서로 투쟁하는 목표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후자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바로 그것이야 말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역사적· 경제적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투쟁의 형태는 비교적 특수하고 일시적인 다양한 요인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고 또 변화하고 있지만, 투쟁의 본질, 그 계급적 내용은 계급이 존재하는 한 결코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투쟁의 본질(세계분할)을 흐려버리고 이 투쟁의 이러저러한 형태만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히, 이를테면 독일 부르주아지카우츠키는 자신의 이론적 고찰 가운데 결과적으로 이들의 편으로 넘어가 버렸다(이 점에 대해서는 후에 서술하기로 한다)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바로 이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염두에 두는 것은 단지 독일의 부르주아지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부르주아지이다. 자본가들이 세계를 분할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악의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도달한 집적의 수준에서 이윤을 획득하려면 이러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들은 상품생산과 자본주의하에서는 다른 분할방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자본에 비례하여’, ‘힘에 비례하여세계를 분할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은 경제적·정치적 발전 정도에 따라 따르다. 현재 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힘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어떠한 문제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들 변화가 순전히경제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경제외적(이를테면 군사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 자본주의 최근 시대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에 조금도 영향을 줄 수 없다. 자본가단체들 간의 투쟁과 협정의 본질문제를 투쟁과 협정의 형태문제 (오늘은 평화, 내일은 전쟁, 모레는 다시 전쟁 하는 식으로)로 대체하는 것은 곧 궤변가의 역할로 빠져드는 것이다.

 

자본주의 최근단계의 시대는 곧, 자본가단체들 간에 세계의 경제적 분할을 토대로 하여 일정한 관계가 성장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또 이와 관련하여 정치적 동맹체 사이, 국가들 사이에서도 세계의 영토적 분할, 식민지 획득을 위한 투쟁,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한 투쟁을 토대로 하여 일정한 관계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6장 열강 간의 세계분할

 

 

지리학자 주판은 유럽 식민지의 영토 확장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19세기 말의 영토 확장을 다음 표와 같이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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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러므로 현 시기의 특징은 아프리카와 폴리네시아의 분할이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 아시아나 아메리카에도 더 이상 미점령지역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지역은 없으므로, 주판의 결론을 더욱 확장시켜 현 시기의 특징은 지구상의 최종적인 분할이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최종적이라는 말은 재분할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오히려 재분할은 가능하며 불가피하다), 자본주의 나라의 식민지정책이 지구상의 미점령지역에 대한 장악을 완료했다는 의미이다. 처음으로 전세계는 완전히 분할되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오직 재분할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제 영토는 주인 없는 상태에서 어느 주인에게로 이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주인으로부터 다른 주인에게로 이전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발전의 최근단계’, 금융자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세계적 식민자정책의 독특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와 이전 시대를 구분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 것인가를 가능한 한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실들을 매우 상세히 다루어야 한다. 여기서 우선 사실에 대한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식민지정책의 강화, 식민지 획득을 위한 투쟁의 첨예화는 바로 금융자본의 시대에서 나타나는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세계는 지금 어떻게 분할되어 있는가?

 

미국의 저술가 모리스는 식민지화의 역사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19세기 각 시기에 영국·프랑스·독일이 소유했던 식민지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다음 표는 그 요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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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경우 식민지 정복이 엄청나게 확장된 시기는 1860~80년 간이며, 19세기의 마지막 20년간에도 상당히 두드러진다. 또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그 시기는 정확히 19세기의 마지막 20년간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자유경쟁이 지배적이었던 독점 이전의 자본주의가 최고도에 달한 시기는 1860년대와 1870년대였다. 지금 우리는 이 시기 바로 직후에 식민지 정복이 엄청나게 확대되고 세계의 영토적 분할을 위한 투쟁이 극도로 격화되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금융자본으로 이행한 것이 세계분할을 위한 투쟁의 격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홉슨은 제국주의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1884~1900년을 유럽 주요 국가들의 격렬한 팽창의 시대라고 특징짓고 있다. 그의 추정에 따르면, 이 기간에 영국은 5,700만의 인구가 사는 370만 평방마일의 영토를 획득했으며, 프랑스는 3,650만의 인구가 사는 360만 평방마일, 독일은 1,470만의 인구가 사는 100만 평방마일, 벨기에는 3,000만의 인구가 사는 90만 평방마일, 포르투갈은 900만의 인구가 사는 80만 평방마일의 영토를 획득했다. 19세기 말, 특히 1880년대 이후 모든 자본주의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은 외교사 및 대외정책사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에서 자유경쟁이 가장 번성했던 시대인 1840~60년간에 영국의 지도적 부르주아 정치가들은 식민지정책에 반대했으며, 식민지해방, 즉 영국으로부터 식민지의 완전한 분리가 불가피하고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베어(M. Beer)1898년에 발표한 현대 영국제국주의라는 논문에서, 대체로 제국주의적 경향을 지닌 디즈레일리 같은 정치가조차도 식민지는 우리 목에 걸린 맷돌이다고 말했던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19세기 말 영국의 당대의 영웅은 공공연히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가장 냉소적으로 제국주의적 정책을 수행한 세실 로즈(Cecil Rhodes)와 조셉 체임벌린 (Joseph Chamberlain)이었던 것이다!

 

이미 그 당시 영국의 지도적인 부르주아 정치가들조차 현대 제국주의의 이른바 순수하게 경제적인 뿌리와 사회·정치적인 뿌리 사이의 연관을 파악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 있는 일이다. 체임벌린은 제국주의를 진실하고 현명하며 경제적인 정책이라고 변호하면서, 영국이 현재 세계시장에서 직면하고 있는 독일·미국·벨기에와의 경쟁을 특히 강조했다. 구원의 길은 독점에 있다, 자본가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카르텔·신디케이트·트러스트를 만들었다. 구원의 길은 독점에 있다, 부르주아지의 정치지도자들도 이렇게 맞장구치면서 아직 분할되지 않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서둘렀다. 세실 로 즈의 절친한 친구인 언론인 스테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세실 로즈는 1895년에 자신의 제국주의적 견해를 그에게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고 한다. “어제 나는 런던의 이스트엔드[노동계급의 거주 지역]에서 어떤 실업자집회를 구경했다네. 거기에서 몇 차례 격앙된 연설을 듣고연설이라고 해야 실은 빵을 달라, 빵을!’ 하는 외침뿐이었지만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광경을 곰곰이 숙고해 본 후, 나는 제국주의의 중요성을 어느 때보다 더욱 확신하게 되었네.……내가 가슴에 품고 있는 이상은 사회문제의 해결이라네. , 이 대영제국의 4,000만 국민을 유혈의 내전에서 구해내려면, 우리 식민지정치가들은 하루빨리 새로운 영토를 손에 넣어 과잉인구를 이주시키고, 공장과 광산에서 생산된 물건들을 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네. 내가 항상 말해 왔지만 제국은 결국 빵과 버터의 문제라네. 내전을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제국주의자가 되어야만 할 걸세.”

 

이것이 바로 백만장자이자 금융왕이며 보어전쟁의 주된 책임을 져야 할 세실 로즈가 1895년에 한 말이다. 그의 제국주의 변호는 보다 조잡하고 뻔뻔스럽다는 점을 제외하면, 본질적으로는 마슬로프(Maslov), 쥐데쿰(Sudekum), 포트레소프(Potresov), 데이비드(David) 및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기타 등등의 신사분들이 주창한 이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세실 로즈는 다만 좀 더 솔직한 사회배외주의자였을 뿐이다.……

 

세계의 영토적 분할,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수십 년간에 일어난 변화를 가능한 한 정확히 묘사하기 위하여, 앞서 인용한 주판의 책에서 세계 모든 열강의 식민지 점유에 관한 자료를 이용해 보자. 주판은 1876년과 1900년을 택했지만 여기서는 1876년과 1914년을 택하기로 한다(1876년은 서구 자본주의의 독점 이전 발전단계가 거의 완성된 시기이기 때문에 매우 적절히 선택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주판의 자료 대신 난는 보다 최근의 통계인 휘브너(Hubner)지리통계표(Geographical and Statistical Tables)를 인용하겠다. 주판은 식민지에 관한 수치만을 제시하고 있지만, 세계분할을 완전히 묘사하기 위해서는 비식민지국 및 반식민지국에 관한 간단한 자료를 덧붙이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반식민지라 할 때 나는 페르시아, 중국, 터키를 그 범주에 포함시켰는데, 그 가운데 페르시아는 이미 거의 완전한 식민지가 된 나라이고, 중국과 터키는 그렇게 되고 있는 중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는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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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20세기로 넘어오는 전환기에 얼마나 완벽하게세계분할이 이루어졌는가를 똑똑히 볼 수 있다. 1876년 이후 6대 열강의 식민지 점유는 4,000km2에서 6,500km250% 이상이나 증가했다. 그 증가량은 2,500km2로 식민지 모국들의 국토를 모두 합친 면적 1,650km21.5배나 된다. 1876년까지 세 개의 강대국 식민지가 전혀 없었고 프랑스의 식민지는 극히 미미한 정도였다. 그러나 1914년까지 이들 네 강대국은 거의 1억의 인구가 사는 1,410km2, 즉 유럽의 1.5배에 달하는 식민지를 획득했다. 식민지의 확장율에 있어서 불균등성은 대단히 크다. 예를 들어 인구나 면적에 커다란 차이가 없는 프랑스·독일·일본을 비교해 보면, 프랑스는 독일과 일본의 식민지를 합한 것의 거의 3배에 달하는 영토를 획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금융자본의 측면에서도 프랑스는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시기의 초기에는 독일과 일본의 금융자본을 합한 것보다 몇 배나 많았을 것이다. 순수하게 경제적인 조건 이외에, 그에 기초하여 지리적 및 기타 조건들도 식민지 영토의 규모에 영향을 미친다. 비록 지난 수십 년간 대규모 산업과 교역, 금융자본의 압력으로 인해 세계의 평준화, 즉 각 나라의 경제 및 생활조건의 평준화과정이 강력하게 진행되었다 해도, 여전히 상당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앞에서 언급한 6대열강도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놀라운 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신흥 자본주의 나라들(미국·독일·일본), 둘째는 이들에 비해 최근 그 발달이 현저하게 느려진 오랜 자본주의 발전의 나라들(영국·프랑스), 셋째는 경제적으로 가장 뒤처진 나라(러시아)로서, 현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전()자본주의적 관계의 특히 조밀한 그물 속에 얽혀 있는 나라이다.

 

앞의 표에는 열강의 식민지 점유와 더불어, 앞으로 일어날 식민지 재분할의 가장 가까운 대상인 작은 국가들의 작은 식민지들도 제시되어 있다. 이들 작은 국가들이 식민지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열강들이 이해대립과 알력으로 인해 서로 분산되어 있어 전리품 분배에 관한 협정을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반식민지국가들은 자연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되는 과도적 형태의 한 예를 보여준다. 금융자본은 모든 경제관계와 국제관계에 있어 대단히 강력한, 결정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으로서, 완전한 독립을 향유하고 있는 국가조차도 자신에게 종속시킬 수 있으며, 또 실제로 종속시키고 있다. 이에 대한 예는 조금 후에 살펴보겠다. 더구나 금융자본은 당연히 종속된 나라와 민족에게 정치적 독립까지 박탈하는 종속형태를 가장 유리한것으로 여기며, 그것으로부터 가장 많은 이윤을 뽑아낸다. 이러 점에서, 반식민지국은 중간단계의 전형적인 예인 것이다. 따라서 나머지 지역들이 이미 모두 분할되어 버린 금융자본의 시대에 이들 반종속국을 둘러싼 투쟁이 특히 격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식민지정책과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근단계 이전에도, 아니 자본주의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다. 노예제를 기초로 했던 로마도 식민지정책을 추구했으며 제국주의를 실시했다. 그러나 경제적 사회구성체들 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무시하거나 뒷전으로 밀어 놓은 제국주의에 관한 일반논문들은 결국 대로마국과 대영제국을 비교하는 따위의 극히 진부하고 공허한 잡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이전 단계들의 자본주의적 식민지정책이라 할지라도 금융자본의 식민지정책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본주의 최근단계의 주요 특질은 대기업가들의 독점단체가 지배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독점체는 한 그룹이 모든 원료자원을 장악할 때 가장 강력하고 튼튼하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국제적 자본가단체들이 자신의 경쟁자들에게서 모든 경쟁의 기회를 박탈하기 위해, 예컨대 철광산이나 유전 등을 매점하기에 얼마나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본 바 있다. 식민지 점유야말로 경쟁자와의 투쟁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우발적 사건상대방이 국가독점체를 설립하는 법률을 제정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경우를 포함하여에 대항할 수 있는 보장이 되어 준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원료자원의 부족이 더욱 강하게 느껴질수록, 전세계에 걸친 경쟁과 원료자원 쟁탈전이 보다 격화될수록,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은 보다 결사적으로 되는 것이다.

 

쉴더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도시 공업인구는 식량 부족보다는 공업원료 부족으로 인해 증가가 억제될 것이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지금 목재의 부족이 점점 심해지며, 목재 가격은 점점 오르고 있다. 피혁이나 섬유공업의 원료도 마찬가지이다. “제조업자 단체들은 전체 세계경제 차원에서 농업과 공업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 노력하고 있다. 그 예로서 1904년에 가장 주요한 몇몇 공업국에서 설립된 국제면방적 업자연맹과 1910년에 같은 형태로 설립된 유럽아마방적업자연맹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개량주의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오늘날 카우츠키의 추종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원료는 값비싸고 위험한식민지정책 없이도 공개시장에서 얻을 수 있으며’, 농업의 전반적인 조건을 단지개선하는 것만으로도 원료공급을 엄청나게 증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바로 자본주의 최근단계의 주된 특질인 독점을 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대한 변호, 제국주의에 대한 미화로 귀착된다. 자유시장은 갈수록 과거의 것이 되고 있으며, 독점적 신디케이트와 트러스트가 자유시장을 하루하루 제한하고 있다. 또한 농업의 조건을 단지개선한다는 것은 요컨대 대중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임금을 올리며 이윤을 줄인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감상적인 개량주의자들의 환상 속에서가 아니라면 식민지 정복 대신 대중의 처지에 관심을 두는 트러스트가 도대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금융자본은 이미 발견된 원료자원의 산지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산지에도 관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놀랄 만큼 급속한 오늘날의 기술발전으로 인해, 오늘은 쓸모없는 토지도 새로운 방법이 고안되거나(이를 위해 대은행은 기술자나 농업전문가 둥으로 특별원정대를 편성하기도 한다) 보다 많은 자본이 투자된다면 내일에는 쓸모 있는 토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광맥의 탐사라든가 원료의 새로운 가공법과 이용법 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금융자본은 자신의 세력권뿐만 아니라 실제 영토까지 확장하려 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러스트가 잠재적인’(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이윤과 독점의 장래 결과까지 고려하여 자신의 자산을 실제 가치의 2~3배로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금융자본도 잠재적인 원료산지를 고려하여,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주인 없는 땅이라도 차지하려는, 또는 이미 분할된 지역을 재분할하려는 격렬한 투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능한 한 최대로 모든 지역의 모든 땅을 장악하려 애쓰는 것이다.

 

영국 자본가들은 그들의 식민지인 이집트에서 면화재배를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1904년에는 전 경지 230ha가운데 60ha, 1/4 이상의 지역에서 면화를 재배했다). 러시아 자본가들도 그들의 식민지인 투르케스탄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을 통해 그들은 외국의 경쟁자를 누르고 보다 좋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고, 보다 쉽게 원료산지를 독점할 수 있으며, 모든 면화 생산 및 제조의 처리과정을 몇몇 소유자들의 수중으로 결합하고 접적시키는, 보다 경제적이고 수익성이 높은 섬유 트러스트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수출에서 나오는 이익 역시 식민지 정복을 자극한다. 왜냐하면 식민지 시장에서는 경쟁자를 배제하고 공급을 확보하며 필요한 연줄을 만드는 등의 일에 쉽사리 독점적 방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때로는 그것만이 유얼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금융자본을 토대로 하여 성장하는 경제외적 상부구조, 즉 금융자본의 정치와 이데올로기는 식민지 정복에 대한 열망을 자극한다. 힐퍼딩은, “금융자본은 자유가 아니라 지배를 원한다고 매우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또 프랑스의 한 부르주아 저술가는 앞에서 인용된 세실 로즈의 사상을, 이를테면 보완·발전시켜, 현대 식민지정책의 근거에는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도 부가 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노동자 대중만이 아니라 중간계급에까지 압박을 가하는 생활의 복잡함과 곤란이 증대한 결과, ‘구 문명권의 모든 나라에서 초조·분노·증오가 쌓여 공공의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한 계급적 통로로 분출되고 있는 에너지가 국내에서 폭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외로 방출되어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

 

자본주의척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정책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금융자본과 그 대외정책이는 곧 세계의 경제적·정치적 분할을 위한 열강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이 국가종속의 수많은 과도적 형태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식민지 소유국과 식민지국이라는 두 개의 주요 집단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금융적·외교적 그물에 갇혀 있는 다양한 형태의 종속국들도 이 시대의 전형이다. 반식민지라는 종속의 한 형태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종속의 또 다른 형태에 대한 예는 아르헨티나에서 볼 수 있다.

 

슐츠-게페르니츠는 영국 제국주의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는 금융적으로 런던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영국의 상업식민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영사의 1909년 보고에 근거하여, 쉴더는 아르헨티나에 투자된 영국자본을 875,000만 프랑으로 추정했다. 이것을 통해 영국 금융자본(그리고 금융자본의 믿음직스러운 친구인 외교)이 아르헨티나 부르주아지, 즉 이 나라의 경제 및 정치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집단과 얼마나 강력한 관계 맺고 있을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치적 독립은 유지하나 금융적·외교적으로는 종속된 다소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은 독립주권국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스페인 계승전쟁 (1701~14) 이래 200년 이상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다. 영국은 경쟁국인 스페인 및 프랑스와의 투쟁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를 보호해 왔다. 그 대가로 영국은 여러가지 상업상의 특권을 비롯하여,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로 수입되는 상품, 특히 자본에 대한 특혜, 그리고 포르투갈의 항만과 섬, 전신망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 등을 획득했다. 이러한 종류의 관계는 물론 강대국과 약소국 간 에 항상 존재해 왔던 것이지만,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시대에 들어 그것은 전반적인 체제가 되고, ‘세계 분할관계의 일부를 형성하며, 세계 금융자본의 활동에 있어 사슬의 고리를 이룬다.

 

세계분할의 문제를 마치는 데 있어 한 가지 점을 더 지적해야겠다. 세계분할의 문제를 매우 공개적이고 명확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스페인전쟁 이후 미국 문헌 및 보어전쟁 이후 영국 문헌들이나, ‘영국 제국주의질시어린눈으로 지켜보며 이 사실에 대해 체계적으로 평가해 왔던 독일 문헌들뿐만이 아니다. 이 문제는 또한 프랑스 부르주아 문헌에서 부르주아적 관점에서나마 매우 광범위하고 명확하게 제기되어 왔다. 예를 들어 역사가인 드리오(Driault)는 그의 저서 19세기 말의 정치적·사회적 제문제가운데 열강과 세계분할이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중국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자유로운 지역은 유럽과 북미의 열강들에 의해 점령되어 버렸다. 이 결과 이미 몇몇 분쟁과 세력권의 이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가까운 미래에 터질 보다 끔찍한 대격변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모두가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자기 자신을 위해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나라들은 이제 그들의 몫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또 다음 세기[20세기]의 가장 본질적인 특정 가운데 하나가 될 전 지구의 엄청난 착취에 참여하지 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겪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유럽과 미국은 최근에, 19세기 말의 가장 현저한 특징인 식민지 확장과 제국주의라는 열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또 덧붙인다. “이러한 세계분할에 있어, 격렬한 지구상의 보물찾기와 대시장 사냥에 있어, 19세기에 확립된 제국들의 세력관계는 그 제국들을 확립한 민족들이 유럽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즉 유럽을 지배하는 열강, 전 유럽의 운명을 좌우하는 민족들은 동시에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식민지 점유의 힘, 다시 말해 아직 평가되지 않은 부를 지배하고자 하는 희망은 유럽 열강의 세력관계에 명백히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이미 유럽 자체의 정치적 조건을 변형시켜 왔던 식민지문제제국주의라 해도 좋을 것이다는 앞으로 그것을 더욱 변형시키게 될 것이다.”

 

7장 자본주의의 특수한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이제 제국주의라는 주제에 대해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가닥들을 한데 모아 총괄해 보자.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일반이 가진 근본적 특징의 발전이자 그 직접적 연속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오직 특정한, 그리고 매우 높은 발전단계에서만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곧 자본주의의 몇 가지 근본적 특징들이 각기 자신의 대립물로 전화하기 시작하는 때이며, 자본주의로부터 보다 높은 사회경제체제로의 이행기의 제반 특질이 모든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때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자유경쟁이 자본주의적 독점에 의해 대체 된다는 사실이다. 자유경쟁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상품생산 일반의 기본적인 특질이며, 독점은 자유경쟁의 직접적 대립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자유경쟁이 독점으로 전화해 가는 것을 우리 눈앞에서 보아 왔다. , 자유경쟁은 대규모 산업을 만들어 내고 소규모 산업을 배제하며, 대산업을 더욱 큰 대산업으로 대체하는 한편, 독점카르텔 · 신디케이트 · 트러스트 및 이들과 융합하여 수십억을 주무르고 있는 10여 개 은행의 자본이 성장해 나오고 또 계속 성장해 잘 정도로 생산과 자본의 집적을 가속화시켰다. 이와 동시에, 자유경쟁으로부터 성장해 나온 독점체는 자유경쟁을 배제하지 않고 그 위에, 그와 나란히 존재하며, 또 그럼으로써 매우 첨예하고 심각한 수많은 대립과 마찰, 갈등을 낳는다. 요컨대 독점은 자본주의로부터 보다 높은 체제로의 이행이다.

 

제국주의를 가능한 한 간결하게 정의한다면, 자본주의의 독점단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금융자본이란 독점적 산업가단체의 자본과 융합하고 있는 소수 독점적 거대은행의 은행자본이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세계의 분할이란 어떤 자본주의 열강에 의해서도 장악되지 않은 영토까지 아무 장해 없이 확장될 수 있었던 식민지정책으로부터 모든 분할이 완료된 영토를 독점적으로 점유하려는 식민지정책으로의 이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간결한 정의는 주요한 것을 요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편리하기는 하나, 정의해야 할 현상의 극히 중요한 특질을 거기에서 연역해 내야하기 때문에 충분치는 못하다. 그러므로 한 현상이 충분히 발전된 상태에서 그것의 모든 연쇄를 완전히 포괄할 수는 없다는, 모든 정의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잇는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측면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5개의 기본적 특질을 포함하는 제국주의의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고도의 단계에 달해, 경제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독점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2)은행자본이 산업자본과 융합하여 금융자본을 이루고, 이를 기초로 하여 금융과두제가 형성된다. (3)상품수출과는 구별되는 자본수출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4) 국제적 독점자본가단체가 형성되어 세계를 분할한다. (5) 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전세계의 영토적 분할이 완료된다. 요컨대 제국주의란, 독점체와 금융자본의 지배가 확립되어 있고, 자본수출이 현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국제트러스트들 간의 세계분할이 시작되고, 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지구상의 모든 영토분할이 완료된 발전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만일 기본적이고 순수하게 경제적인 의미위에서 내린 정의는 여기에 한정되었지만뿐만 아니라, 이 단계의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일반에 대하여 갖는 역사적 위치나, 노동계급운동 내의 두 가지 주요 경향과 제국주의 간의 관계까지 염두에 둔다면, 제국주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또 정의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위와 같이 해석된 제국주의는 의심할 바 없이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한 단계를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독자들에게 제국주의에 대한 가장 근거 있는 인식을 전해주기 위해 나는 의도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최근단계에서 나타나는 논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을 인정해야 했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견해를 되도록 광범위하게 인용하려고 노력했다. 똑같은 목적으로 나는, 은행자본 등이 어느 정도로 성장했는가, 그리고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양에서 질로의 전화, 즉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로의 전화가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상세한 통계를 인용했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 및 사회에 있어서의 모든 경계는 제한적이며 가변적이다. 따라서, 예컨대 제국주의가 결정적으로 확립된 것이 몇 년 혹은 몇 년대인가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정의하는 문제에 있어 우리는 무엇보다 1889년부터 1914년까지 25년간의 이른바 제2인터내셔널시대에 주요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던 칼 카우츠키와 논쟁을 벌여야 한다. 카우츠키는 1915년에 제국주의에 대한 우리의 정의 속에 표현되어 있는 근본적 사상에 대해 단호한 공격을 가했다. 아니 그는 이미 191411월에, 제국주의는 경제의 한 국면이나 단계가 아니라 정책으로, 즉 금융자본이 즐겨 사용하는특정한 정책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든가, 제국주의를 현대 자본주의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만일 제국주의를 현대 자본주의의 모든 현상카르텔, 보호정책, 금융업자의 지배, 식민지정책으로 이해한다면, 자본주의에 있어 제국주의가 필연적인가의 문제는 결국 극히 진부한 동어반복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렇게 야해할 경우 제국주의는 당연히 자본주의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는 등으로 이야기한 바 있다. 카우츠키의 사상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카우츠키 자신이 내린 제국주의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내가 제시한 사상의 본질과 정면으로 대립되고 있다(왜냐하면 이미 오래 전부터 비슷한 사상을 옹호해 온 독일 마르크스주의자 진영으로부터 나온 반론을 카우츠키는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 내의 한 특정한 조류의 반론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카우츠키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제국주의는 고도로 발전된 산업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제국주의는 어느 민족이 살고 있는가에 관계없이 모든 거대한 농업[카우츠키의 강조]지역을 지배하거나 병합하려는 산업자본주의 민족의 노력 속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면적으로, 즉 제멋대로 민족문제만을 뽑아내어(비록 이 문제가 제국주의와의 관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극히 중요하다 할지라도), 제멋대로 또 부정확하게도 이 문제를 단지 타민족을 병합하는 나라의 산업자본과만 결부시키고 있으며, 똑같이 제멋대로 또 부정확하게도 농업지역의 병합만을 문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병합을·추구한다. 카우츠키가 내린 정의의 정치적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옳기는 하나 대단히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제국주의의 정치적 측면은 폭력과 반동으로의 지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카우츠키 자신이 그의 정의 속에 수용하고 있는 문제의 경제적 측면이다. 카우츠키가 내린 정의 속에 포함된 오류는 매우 명백하다. 제국주의의 특징은 산업자본이 아니라 바로 금융자본이다. 프랑스에서 1880년대 이후 병합적(식민지적) 정책이 엄청나게 격화된 이유가 바로 산업자본이 약화된 대신 금융자본이 매우 급속히 발전했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제국주의의 특징은 바로, 농업지역뿐만 아니라 고도로 공업화된 지역까지도 병합하려는 지향(벨기에에 대한 독일의 욕망, 로렌에 대한 프랑스의 욕망)에 있다. 그 이유는 세계의 분할이 이미 완료되었으므로 모든 종류의 영토에까지 손을 뻗쳐 재분할을 기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며,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몇몇 열강들 간의 경쟁, 즉 자신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경쟁자를 약화시키고 그 헤게모니를 잠식하기 위해서 영토를 정복하려는 열강들 간의 경쟁이야말로 제국주의의 본질적 특성이기 때문이다(벨기에는 독일에게 영국에 대항하기 위한 작전기지로서 중요하며, 바그다드는 영국에게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작전가지로서 특히 중요하다).

 

카우츠키는 영국인 저자들이 제국주의카우츠키 자신이 이해하는 의미로서라는 말에 순수하게 정치적인 의의만을 부여해 왔다고 되풀이하여 강조한다. 그렇다면, 1902년에 출간된 영국인 저술가 홉슨의 제국주의론을 한번 인용해 보자.

 

 

새로운 제국주의가 이전의 제국주의와 다른 점은, 첫째로 점점 커져 가는 단일한 한 제국의 야심 대신 각기 정치적 팽창과 상업적 이익을 향한 비슷한 욕구의 자극 하에 경쟁하는 여러 제국들의 이론과 실천이 나타난다는 것이며, 둘째로 금융상의 또는 투자상의 이익이 상업상의 이익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카우츠키가 영국인 저술가 일반을 예로든 것은 전적으로 오류임을 알 수 있다(영국의 속류 제국주의자 또는 제국주의의 공공연한 옹호자를 예로든 것이 아니라면). 또한 우리는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한다고 줄곧 공언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회자유주의자인 홉슨보다 오히려 한 걸음 후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홉슨은, 여러 제국주의를 간의 경쟁, 상인에 대한 금융업자의 우월성이라는 현대 제국주의의 두 가지 역사적으로 구체적인’(카우츠키의 정의는 역사적 구체성에 대한 위조이다 !) 특질을 보다 정확히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공업국에 의한 농업국의 병합이 주된 문제라면, 오히려 상인의 역할이 전면으로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카우츠키의 정의는 단지 오류이며 비마르크스주의적인 데 그치지 않는다. 나아가 그것은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실천의 괴리를 빚어 왔던 모든 사고체계의 토대로 기능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자본주의의 최근단계를 제국주의라 불러야 하는가 금융자본의 단계라 불러야 하는가 따위의 카우츠키가 제기한 용어상의 논쟁은 전혀 주목할 가치가 없다. 그것을 어떻게 이름짓든 아무런 차이도 없다. 문제의 본질은 카우츠키가 제국주의의 정치를 제국주의의 경제로부터 분리시키고, 병합을 금융자본이 선호하는정책이라고 설명하며, 이것 또 다른 부르주아 정책카우츠키에 의하면, 이것도 역사 마찬가지로 금융자본의 기초 위에서 가능하다과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 있다. 이 경우 경제에서의 독점은 정치에서의 비독점적·비폭력적·비병합적 방식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또한, 바로 금융자본의 시대에 완료되었으며 지금은 거대 자본주의 국가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독특한 경쟁형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세계의 영토적 분할은 비제국주의적 정책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 최근단계의 가장 심각한 모순들의 뿌리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얼버무리며, 마르크스주의 대신 부르주아개량주의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와 병합의 옹호자인 독일의 쿠노(Cunow)와 논쟁을 벌인다. 쿠노는 졸렬하고도 뻔뻔스럽게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제국주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불가피하며 진보적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역시 진보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국주의 앞에 엎드려 절하고 제국주의를 찬미해야 한다! 이것은 1894~95년에 나로드니키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의 모습을 묘사한 것과 매우 비슷하다. 나로드니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만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불가피하며 진보적인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들은 선술집이라도 열어서 자본주의를 이식해야 할 것이다! 쿠노에 대한 카우츠키의 답변은 이렇다. 제국주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단지 오늘날의 자본주의 정책형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정책과 투쟁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며, 제국주의, 병합 등과 투쟁해야 한 다.

 

이러한 답변은 매우 그럴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제국주의와의 화해에 대한 보다 교묘하고 보다 위장된(따라서 보다 위험스러운) 옹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트러스트와 은행의 경제적 토대는 손대지 않은 채 트러스트와 은행의 정책에 대해서만 투쟁하는 것은 결국 부르주아개량주의와 평화주의이며, 경건한 소망에 대한 인정 많고 순진무구한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제반 모순의 뿌리 전체를 폭로하는 대신 그것들을 회피하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모순을 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와는 아 관계도 없는 카우츠키의 이론인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이론은 쿠노 일파와의 통일을 옹호하는 데 이바지할 수밖에 없다!

 

카우츠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새로운 국면, 즉 카르텔정책이 대외정책에까지 확장되는 초제국주의(ultra-imperialism)의 국면을 거치는 것이 능한 일은 아니다.” 이 초제국주의, 곧 초월제국주의 (super-imperialism) 국면이란 곧 전세계 제국주의들 간의 투쟁이 아닌 연합의 국면이고, 자본주의하에서 전쟁이 종식되는 국면이며, “국제적으로 연합한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의 공동착취가 일어나는 국면을 말한다.

 

초제국주의 이론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는가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나중에 그것을 다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본서의 전반적인 서술체계에 따라 먼저 이 문제와 관계된 정확한 경제적 자료를 검토해야 한다.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초제국주의는 가능한가, 아니면 초()헛소리인가?

 

만약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이 순수한추상을 뜻한다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요컨대, 발전은 독점을 향하여, 따라서 단 하나의 전세계적 독점올 향하여, 단 하나의 전세계적 트러스트를 향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명제밖에 없다. 이 명제는 물론 논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실험실 내에서의 식료품 제조를 향하여 발전이 진행되고 있다는 진술만큼이나 완전히 무의미한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제국주의 이론초농업 이론만큼이나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러나 만약 금융자본의 시대라는 20세기 초에 시작된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시대의 순수하게 경제적인조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초제국주의라는 죽은 추상(이것은 오로지 사람들의 주의를 현존하는 심각한 대립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리려는 반동적인 목적에 이바지할 뿐이다)에 대한 최선의 답은 이 추상을 현대 세계경제의 구체적인 경제현실에 대비시키는 것이다. 초제국주의 운운하는 카우츠키의 극도로 무의미한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금융자본의 지배가 세계경제에 내재하는 불균등성과 모순을실제로는 증가시킴에도 불구하고감소시킨다는 따위의, 제국주의 옹호자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지극히 잘못된 사상을 조장하고 있다.

 

칼베르는 세계경제입문이라는 자신의 소책자에서 1900년을 전후한 세계경제의 내적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주요한, 순수하게 경제적인 자료를 개괄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전세계를, 중앙유럽(러시아와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 영국, 러시아, 동아시아, 아메리카의 5주요 경제지역으로 나눈다. 식민지는 그것이 속한 국가의 지역에 포함되어 있으며, 지역에 따라 분할되지 않은 몇몇 나라, 예를 들면 아시아의 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아라비아, 아프리카의 모로코·아비시니아 등은 누락되어 있다(P. 129의 표).

 

그가 인용한 이들 지역에 관한 자료를 간략한 형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중앙유럽, 영국, 아메리카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운송기관, 무역, 공업이 고도로 발달한) 3개 지역이다. 이 지역들에는 세계를 지배하는 세 국가인 독일, 영국, 미국이 있다. 이들 나라 사이의 제국주의적 경쟁과 투쟁은 독일이 별로 중요치 않은 지역과 얼마 안 되는 식민지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첨예화되고 있다. ‘중앙유럽의 형성은 아직 장래의 일이고, 지금 그것은 필사적인 투쟁의 한가운데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현재 전 유럽의 뚜렷한 특징은 정치적 분열상태이다. 이에 반하여 영국과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정치적 집적이 고도로 발달했지만, 광대한 식민지를 갖고 있는 영국과 변변찮은 식민지를 가진 미국 간에는 커다란 불균형이 존재한다. 한편 식민지에서는 자본주의가 이제 막 발전하기 시작했을 뿐이며, 남아메리카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정차 치열해지고 있다.

 

 

주요경제지역

 

면적

 

(백만 km2)

 

인구

 

(백만 명)

 

운송

 

무역

 

공업생산

 

철도

 

(km)

 

상선

 

(백만 톤)

 

수출입

 

(억 마르크)

 

석탄

 

(백만 톤)

 

선철

 

(백만 톤)

 

방적기 수

 

(백만 대)

 

중앙유럽

 

 

영국

 

 

러시아

 

동아시아

 

아메리카

 

27.6

 

(23.6)*

 

28.9

 

(28.6)

 

22

 

12

 

30

 

388

 

(146)

 

398

 

(355)

 

131

 

389

 

148

 

204

 

 

140

 

 

63

 

8

 

379

 

8

 

 

11

 

 

1

 

1

 

6

 

410

 

 

250

 

 

30

 

20

 

140

 

251

 

 

249

 

 

16

 

8

 

245

 

15

 

 

9

 

 

3

 

0.02

 

14

 

26

 

 

51

 

 

7

 

2

 

19

 

* 괄호 안의 수치는 식민지의 면적과 인구를 나타낸다.

 

러시아와 동아시아지역은 자본주의 발전이 미약한 2개 지역이다. 전자는 인구가 극도로 희박하고 후자는 극도로 조밀하며, 전자에는 정치적 집적이 고도화된 데 비해 후자에는 정치적 접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의 분할이 이제 막 시작되어, 중국을 둘러 싼 일본과 미국 등의 투쟁은 점차 격렬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경제적·정치적 조건의 다양성, 발전 속도에 있어서 여러 나라의 심각한 불균형, 제국주의국가들 간의 폭력적인 투쟁평화로운초제국주의라는 카우츠키의 어리석은 우화와 대비해 보라. 그것이야말로 냉혹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겁먹은 속물의 반동적인 시도가 아닌가? 카우츠키가 초제국주의의 맹아라고 상상한(실험실에서 새로운 알약 하나 제조한 것을 초농업의 맹아라고 설명할 수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국제카르텔이야말로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의 실례이며, 평화적 분할로부터 비평화적 분할로의 이행 또는 그 역의 실례가 아닌가? 예컨대 국제 철도신디케이트와 국제 해운트러스트에 독일이 가담한 가운데 평화적으로 전세계를 분할했던 미국 및 기타 나라의 금융자본은 이제 전혀 평화적이 아닌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새로운 역관계를 기초로 하여 세계를 재분할하는 데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금융자본과 트러스트는 세계경제 각 부분 간의 성장률의 차이를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대시킨다. 자본주의하에서 일단 역관계가 변화하면, 힘에 의한 것 외에 또 다른 모순 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는가? 철도에 대한 통계는 세계경제에 있어서 자본주의와 금융자본의 각기 다른 성장률을 보여주는 대단히 정확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제국주의적 발전의 최근 수십 년간 철도 총연장은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철 도

 

(단위 : km)

 

 

1890

 

1913

 

증가

 

유럽

 

미국

 

224

 

268

 

346

 

411

 

122

 

143

 

식민지 전체

 

82

 

125

 

210

 

347

 

128

 

222

 

아시아·아메리카 지역의 독립·반독립국

 

43

 

137

 

94

 

 

 

 

 

 

617

 

1,104

 

 

 

표에서 보듯이 철도의 발전은 식민지 또는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독립(및 반독립)국가에서 가장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이들 지역에서는 4~5개 거대자본주의국가들의 금융자본이 전면적인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다. 식민지 및 아시아와 아메리카 각국에 20km의 새로운 철도가 부설되었다는 것은 높은 이윤에 대한 특별한 보장이나 철강산업을 위한 수익성 높은 주문 등의 특히 유리한 조건하에서 400억 마르크 이상의 새로운 투자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식민지와 해외 여러 나라들에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새로운 제국주의 열강(예를 들면 일본)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제국주의들 간의 투쟁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또한 특히 수익성 높은 식민지기업과 해외기업으로부터 금융자본이 징수하는 공물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전리품의 분할에 있어서 특히 커다란 몫은, 생산력 발전의 속도에서 항상 선두를 차지하지는 않는 나라들에게 돌아간다. 식민지를 포함하여 계산한 거대열강의 철도 총연장은 다음과 같다.

 

 

(단위 : km)

 

 

1890

 

1913

 

증가

 

미 국

 

영 국

 

러시아

 

독 일

 

프랑스

 

268

 

107

 

32

 

43

 

41

 

413

 

208

 

78

 

68

 

63

 

145

 

101

 

46

 

25

 

22

 

 

491

 

830

 

339

 

 

이와 같이, 현존하는 전체 철도의 대략 80%5대열강의 수중에 집적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철도 소유권의 집적, 즉 금융자본의 집적은 훨씬 더 엄청나다. 왜냐하면 예컨대 프랑스와 영국의 백만장자들은 미국, 러시아 및 기타 여러 나라 철도 주식과 채권의 막대한 양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식민지 덕분에 자신의철도망을 독일의 4배에 해당하는 10km로 확장시켰다. 그렇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기간 동안 독일에서의 생산력 발전, 특히 석탄 및 철강산업의 발전은 프랑스나 러시아는 물론 영국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급속했다. 1892년의 선철생산량은 영국이 680만 톤, 독일은 490만 톤이었다. 그런데 1912년에는 영국이 900만 톤, 독일은 1,760만 톤을 생산했다. 그러므로 이 측면에서 독일은 영국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다.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축적 간의 불균형,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 분할과 금융자본의 세력권 간의 불균형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자본주의하에서 전쟁 이외에 어떠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8장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후화

 

 

이제 우리는 제국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 특히 그간의 논의 대부분이 별반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는 측면을 검토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 힐퍼딩의 결점 가운데 하나도 바로 여기에서 비마르크스주의자 홉슨에 비하여 한 걸음 물러섰다는 데 있다. 그 측면이란 곧 제국주의의 특성인 기생성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제국주의의 가장 뿌리 깊은 경제적 토대는 독점, 곧 자본주의적 독점이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로부터 성장했으며, 상품생산과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환경 속에 있고, 환경과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모순관계에 있는 독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독점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정체와 부패의 경향을 낳는다.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독점가격이 설정되는 한, 기술진보의 동인, 따라서 다른 모든 진보의 동인은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아가 기술진보를 일부러 늦출 수도 있는 경제적 가능성까지 생겨난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오웬스라는 사람이 병 제조법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다. 그런데 오웬스의 특허권을 사들인 독일의 병 제조업 카르텔은 그것을 묵혀두고 그 이용을 방해했던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하에서 독점은 결코 완전히, 또 오랜 기간 동안 마냥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을 제거할 수는 없다(덧붙이자면, 초제국주의 이론이 터무니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기술적 개선을 도입함으로써 생산을 절감하고 이윤을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에, 변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독점에 고유한 정체와 부패의 경향은 계속 작용하며, 몇몇 산업분야에서, 몇몇 나라에서 일정기간 동안 우위를 점한다.

 

매우 광대하고 자원이 풍부하거나 입지조건이 좋은 식민지의 독점적 소유권도 이와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나아가 제국주의는, ‘앞에서 보았듯이 유가증권의 형태로 1,000~1,500억 프랑에 달하는 몇몇 나라 화폐 자본의 막대한 축적이다. 그 결과 어떤 기업에서도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작업으로 삼고 있으며, ‘이자표에 의해 살아가는 금리생활자의 계급, 아니 계층이 비정상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제국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경제적 토대 가운데 하나인 자본수출은 금리생활자를 생산으로부터 한층 더 완벽하게 분리시키고, 몇몇 해외 나라와 식민지의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먹고 사는 나라 전체에 기생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홉슨은 “1893년 당시 해외에 투자된 영국자본은 대영제국 총 자산의 약 15% 정도였다고 쓰고 있다. 나는 이 자본이 1915년까지 약 2.5배가량 증가되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한다. 홉슨은 계속하여 이렇게 쓴다. “납세자에게는 매우 큰 부담을 주는 반면, 상공업자에게는 극히 미미한 의미밖에 주지 못하는 침략적 제국주의는……투자가들에게는 커다란 이익의 원천이다.……영국이 전체 대외무역과 식민지무역, 수출과 수업의 중개수수료로 벌어들이는 연간 수입은 기펜(R. Giffen)경의 추산에 따르면, 1899년의 경우 총 거래액 8억 파운드의 2.5%로 간주하여 1,800만 파운드(17, 000만 루블)에 달한다. 이 액수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영국의 침략적 제국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투자된자본으로부터 나오는 9, 000~1억 파운드의 수입, 곧 금리생활자의 수입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금리생활자의 수입은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국이 대외무역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5배에 달한다! 바로 이것이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적 기생성의 본질이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금리생활국가(Rentnerstaat)’ 혹은 고리대국가라는 용어가 제국주의를 다루는 경제 문헌에서 널리 사용되는 것이다. 세계는 한 줌의 고리대국가와 압도적 다수의 채무국가로 분할되었다. 슐츠-게페르니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국투자 서열의 선두에는 정치적으로 종속되어 있거나 동맹을 맺은 나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국은 이집트, 일본, 중국, 남아메리카에 차관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영국 함대는 필요한 경우 총독의 역할을 수행한다. 영국의 정치적 위력은 채무국의 반역으로부터 영국을 보호한다.” 사르토리우스 폰 발터스하우젠은 그의 저서 해외 자본투자의 국민경제체계에서 네덜란드를 금리생활국가의 모델로 들면서, 영국과 프랑스도 지금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쉴더는 영국·프랑스·독일·벨기에·스위스의 5개 공업국가를 명백히 공인된 채권국이라고 보고 있다. 그가 네덜란드를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단지 이 나라가 공업적으로 거의 발전되지 않았기때문이다. 미국은 아메리카 나라들에 대해서만 채권국이다.

 

슐츠-게페르니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국은 점차 공업국가에서 채권국가로 전환되고 있다. 공업 생산물과 공산품 수출이 절대적으로는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자와 주식배당금, 유가증권 발행, 수수료, 투기에서 나오는 수입이 국민경제 전반에 대해서 지나는 상대적 비중이 증대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것이 제국주의적 지배의 경제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 이상으로 채권국은 채무국에 유착되어 있다.” 독일에 관해서는, 베를린의 은행지 발행인 란스부르그가 1911년에 금리생활국가 독일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독일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혼히 볼 수 있는 금리생활자가 되고자 하는 갈망에 대해 즐겨 비웃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부르주아지에 관한 한 독일의 상황도 점점 프랑스와 비슷해져 간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금리생활국가는 부패하고 있는 기생적 자본주의국가이며, 이러한 상황은 일반적으로는 그 나라의 모든 사회·정치적 조건에, 특수하게는 노동운동의 두 가지 기본적 조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을 가능한 한 가장 명료하게 입증하기 위해서, 상당히 믿을 만한 증인으로 홉슨을 인용해 보자. 왜냐하면 그는 마르크주의 정통으로 기울고 있다는 의심을 받지도 않을 것이고, 또 영국인이므로 식민지나 금융자본, 제국주의적 경험이 가장 풍부한 나라의 사정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어전쟁의 경험을 생생하게 회상하면서, 홉슨은 제국주의와 금융업자간의 이익의 연계, 청부나 납품에서 생기는 금융업자 이윤의 증대 등에 대해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명확히 기생적인 정책의 지도자는 자본가이지만, 노동자의 특정 부분에게도 똑같은 동기가 작용하고 있다. 수많은 도시에서 매우 중요한 거래들은 정부의 고용과 계약에 의존한다. 야금업과 조선업의 중심인 제국주의(영국역주)는 다분히 이러한 사실에 의거해 발흥했다.” 홉슨의 견해에 의하면 구제국들이 약화된 것은, 경제적 기생성종속민족으로 충원된 군대편성이라는 두 가지 상황 때문 이었다. “먼저 경제적 기생성의 관행을 통해, 지배국가는 지배계급을 부유하게 하고 자국의 하층계급을 매수하여 온순하게 만드는 데 자신의 속령·식민지·종속국을 이용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러한 매수가 경제적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높은 독점 이윤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상황에 관하여 홉슨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제국주의적 맹목성의 가장 기묘한 징후 가운데 하나는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나라들이 무모할 정도로 무신경하게 이 위험스런 의존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극단을 치닫고 있는 것은 영국이다. 우리에게 인도제국을 얻게 해 준 전투의 대부분은 원주민들이 치른 것이었다. 인도에서, 보다 최근에는 이집트에서도, 대규모의 원주민 상비군은 영국인 사령관의 지휘 하에 있다. 우리의 아프리카 자치령과 관련된 전투 역시 남부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원주민들이 치른 것이다.”

 

홉슨은 중국 분할의 전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경제적 평가를 내린다.“(중국의 분할아 완료된역주) 그때가 되면, 서유럽의 대부분은 오늘날 이미 영국 남부지역, 리비에라 및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관광지대나 저택지대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과 성격을 지나게 모른다. , 극동으로부터 배당금과 연금을 거두어들이는 부유한 귀족집단, 이보다 다소 많은 전문인 고용자 및 소상인집단, 그리고 운송업무 및 소비제품의 최종 생산행정에 종사하는 대규모 노동자와 하인집단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로부터 주식품과 공산품까지 공물로 유입되었다면, 기간산업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우리는 서유럽국가들의 보다 큰 동맹, 즉 일종의 유럽열강연합의 가능성까지 예견해 왔다. 이것은 곧 세계문명의 대의를 촉진시키기는커녕 서유럽의 기생성이라는 거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선진산업국들의 집단이다. 거기서 그 상층은 아시아, 아프리카로부터 거두어들인 막대한 공물로써, 이제 더 이상 농업과 공업의 주요 산업에 종사하지 않고 새로운 금융귀족의 지배 하에서 개인적 또는 부차적 산업서비스를 수행하는 수많은 고용인들을 온순하게 길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전망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지만]을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코웃음치는 사람이 있다면, 이미 이러한 상태에 빠져 버린 오늘날 영국 남부지방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을 살펴보라. 또한 중국이 금융업자·투자가·정치관료·상공업관료 등의 유사한 집단의 경제적 지배에 종속됨으로써 세계역사상 가장 커다란 이윤의 잠재적 저수지로부터 이윤을 퍼올려 유럽에서 소비할 경우, 그러한 체제가 얼마나 널리 확산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물론 사태가 너무 복잡하고 세계 여러 세력들의 움직임도 예측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미래에 대하여 이러한 해석 또는 다른 어떤 하나의 해석밖에 있을 수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서유럽의 제국주의를 좌우하고 있는 세력들은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저항이나 방향전환이 없는 한 대략 그와 비슷한 결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저자는 완전히 옳다. 만약 제국주의 세력이 아무런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았다면 이들은 바로 그가 기술한 대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는 현재의 제국주의적 정세 하에서 유럽합중국의 의미를 올바르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홉슨은 한 가지 사실, 즉 지금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시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이 내부에서도 바로 이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한결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였어야 했다. 중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 대한 착취 및 세계분할을 의미하며, 한 줌의 매우 부유한 나라들에 대한 높은 독점이윤을 의미하는 제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층부를 경제적으로 매수할 수 있게 해 주며, 이는 또한 기회주의를 육성하고 형성하고 강화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제국주의에 대하여, 특수하게는 기회주의에 대하여 저항하는 세력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회자유주의자인 홉슨은 당연히 그러한 세력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제국주의를 변호했던 탓으로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충분히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을 독일의 기회주의자 게르하르트 힐데브란트 (Gerhard Hildebrand)는 홉슨을 매우 훌륭히 보충하여,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항하기 위한, ‘위대한 이슬람운동에 대항하기 위한, ‘강한 육·해군을 유지하기 위한, ‘중국-일본 연합에 대항하기 위한……공동행동을 목적으로 하는 서유럽합중국(러시아는 제외)을 주창하고 있다.

 

슐츠-게페르니츠의 책에서 나타난 영국 제국주의의 서술도 그와 똑같은 기생성의 특정을 보여준다. 1865년에서 1898년까지 영국의 국민소득은 거의 2배로 뛰었지만, 이 기간 동안 국외로부터의소득은 9배로 증가했다. 제국주의의 공적흑인에게 근면의 습관을 훈련시키는데 있다면(그것은 강제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국주의의의 위험, “유럽이 육체적으로 고된 노역의 부담먼저 농업 및 광산노동, 그 후에는 보다 거친 공업노동까지을 유색인종들에게 전가시키고, 자기 자신은 금리생활자의 역할d[ 만족할 것이며, 아마도 그러한 방식으로 유색인종의 경제적인, 나아가 정치적인 해방으로 향하는 길을 닦으리라는데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이제 경작되지 않고 부자들의 스포츠나 오락을 위해 사용되는 토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가장 귀족적인 사냥터이며 유희장인 스코틀랜드의 경우, 흔히들 그것은 자신의 과거와 카네기씨(미국의 억만장자)가 먹여살리고 있다고 말한다. 경마와 여우사냥만을 위해서 영국은 연간 1,400만 파운드(13,000만 루블)를 지출한다. 영국의 금리생활자 수는 약 1백만 명에 달한다. 그 반면 전체 인구 가운데 생산에 고용된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단위 : 백만 명)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인구

 

기본산업부문에

 

종사하는 인구

 

전체 인구에 대한

 

비율(%)

 

1851

 

1901

 

17.9

 

32.5

 

4.1

 

4.9

 

23

 

15

 

 

또한 ‘20세기 초의 영국 제국주의를 연구하는 부르주아 학자(슐츠-게페르니츠를 가리킴역주)는 영국 노동계급에 대하여 말할 때 노동자 상층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하층을 체계적으로 구분해야 한다. 이 상층은 협동조합, 노동조합, 스포츠클럽 및 수많은 종교단체에 대부분의 구성원을 공급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조응하여 선거제도도 확립되는데, 영국에서 이 선거제도는 아직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하층을 배제하기에 충분할 만큼 제한되어 있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를 미화하기 위하여, 대개 프롤레타리아트의 극소수에 불과한 이 상충만이 언급된다. 예를 들면, “실업문제는 주로 런던의 문제 또는 정치가들이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트 하층의 문제일 뿐이다.……그러나 이 저자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부르주아 정치가들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기회주의자들도 그들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지금 서술하고 있는 사실들과 관련된 제국주의의 특질 가운데 하나는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의 이주는 감소하는 반면, 보다 임금이 낮은 후진국으로부터 이들 나라로의 이주는 증대한다는 점이다. 홉슨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1884년 이래 영국으로부터의 이출민은 감소해 왔다. 1884년에 242,000명이었던 이출민의 수는 1900년에는 169,000명으로 감소했다. 독일로부터의 이출민은 1881~90년간 1453, 000명으로 최고에 이르렀지만, 그 후 20년간은 10년마다 각각 544,000명 및 341,000명으로 감소했다. 반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등지에서 독일로 온 노동자 수는 증가했다. 1907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독일 내의 외국인 수는 1342,294명으로서, 그 가운데 공업노동자는 44800, 농업노동자는 257,329명이었다. 프랑스에서 광산 노동자의 대부분은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등의 외국인들이다. 미국의 경우 동유럽과 남유럽에서 온 이주민은 가장 임금이 낮은 일에 종사하는 반면, 미국인 노동자는 대개 감독직이나 보다 임금수준이 높은 일자리에 있다. 제국주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특권충을 창출하여 이들을 광범한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을 분리시키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기회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며 노동계급운동을 일시적으로 부패시키는 제국주의의 경향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나타났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곧 영국에서는, 방대한 삭민지 소유와 세계시장에서의 독점적 위치라는 제국주의의 중요한 두 가지 특정이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수십 년간에 걸쳐서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와 영국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특질 간의 이러한 연관관계를 추적했다. 예를 들면 엥겔스는 1858107일 마르크스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사실상 갈수록 부르주아지화되어 가며, 그 결과 전세계에서 가장 부르주아적인 이 나라는 궁극적으로 부르주아지와 아울러 부르주아적 귀족과 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소유하는 것을 명백히 목표로 하는 듯하네. 하기야 전세계를 착취하는 국민으로서 이는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 그 후 4반세기가 지난 1881811일자의 편지에서 엥겔스는 중간계급에게 팔렸거나 적어도 이들로부터 돈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이끌고 있는 최악의 영국 노동조합을 말하고 있다. 또한 카우츠키에게 보낸 1882912일자의 편지에서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신은 내게 영국노동자들이 식민지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소? 그건 그들이 일반적으로 정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오. 이곳에는 노동자당도 없고 사실상 보수당과 급진자유당만 있을 뿐이오. 그리고 영국노동자는 세계시장과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독점이 가져다주는 향연에 매우 즐겁게 끼어들고 있을 뿐이오.”(엥겔스는 1892년에 출판된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2판 서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원인은 영국에 의한 전세계의 착취, 세계시장에서의 그 독점적 위치, 영국의 식민지 독점이며, 결과는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분이 부르주아지화되고 있다는 것, 그 부분은 부르주아지에게 매수되거나 적어도 그들로부터 돈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지도를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는 한 줌의 국가들 간에 세계분할을 완료했으며, 이들 각각은 오늘날 1858년에 영국이 착취했던 것보다 단지 조금 작을 뿐인 전세계의 일부를 착취(초과이윤을 끌어낸다는 의미에서)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각각은 트러스트와 카르텔, 금융자본, 채권-채무관계의 덕택으로 세계시장에서 독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일정한 정도의 식민지 독점을 향유하고 있다(우리는 앞에서 전세계 식민지령 7,500km2 가운데 6,500km2, 86%6대 열강에게, 6,100km2, 81%3대 열강에게 장악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현 상황의 뚜렷한 특정은 노동계급운동의 전반적·필수적 이해와 기회주의 간의 비화해성을 더욱 증가시키는 경제적·정치적 조건들이 우세해졌다는 데 있다. 즉 제국주의는 맹아의 상태에서 지배적인 체제로 성장했고, 자본주의적 독점체는 경제와 정치에서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세계분할이 완료되었다. 다른 한편 영국의 전일적인 독점에 대신하여 몇몇 제국주의열강들이 이 독점에서 한 몫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바, 이 경쟁이야말로 20세기 초반 전 시기의 특징이다. 이제 기회주의는 19세기 후반 영국에서처럼 수십 년 동안이나 한 나라의 노동계급운동을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은 많은 나라들에서 익고 무르익고 썩어 버려, 결국에는 사회배외주의(social-chauvinism)’라는 형태로 부르주아정책과 완전히 융합되어 버린 것이다.

 

9장 제국주의 비판

 

 

넓은 의미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라 할 때 그것은 사회의 각 계급이 자신들의 일반적 이데올로기와 연관하여 제국주의 정책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소수의 손에 집중된 거대한 규모의 금융자본이 중소 자본가뿐만 아니라 영세 자본가와 장인들까지도 종속시키는 극히 치밀하고 광범위한 관계 및 연관망을 만들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분할과 다른 나라에 대한 지배를 위해 민족국가적 금융업자 집단들 간의 투쟁이 끊임없이 증가·격화되고 있는 탓으로, 유산계급들은 일제히 제국주의의 편으로 넘어가고 있다. 제국주의의 앞날에 대한 전반적인열광, 제국주의에 대한 광적인 변호와 최대한의 미화, 이것들이 바로 현 시대의 특정이다.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또한 노동계급으로도 침투하고 있다. 노동계급은 다른 계급들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만리장성 따위는 없다. 독일의 이른바 사회민주당의 현 지도부는 매우 적절하게도 사회제국주의자’, 즉 말로는 사회주의자, 행동으로는 제국주의자라 불린다. 홉슨은 이미 1902년에 기회주의적 페이비언협회에 속하는 페이비언 제국주의자들이 영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바 있다.

 

부르주아 학자와 평론가들은 대개 어느 정도 은폐된 형태로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나선다. 즉 이들은 제국주의의 완전한 지배와 그 뿌리 깊은 근원을 숨기고, 국부적이고 부차적인 요소들만 전면에 내세우며, 트러스트나 은행을 경찰이 감독한다는 따위의 완전히 어처구니없는 개량안을 제시함으로써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사람들의 주의를 돌리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특징을 개량하려는 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대담하게 주장할 만큼 냉소적이고 솔직한 제국주의자들은 오히려 드물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세계경제기록Archives of World Economy이라는 잡지에서 독일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물론 독일의 식민지는 아니지만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을 연구하고자 한다. 이들은 인도에서의 소요와 저항운동, 나탈(남아프리카)과 네덜란드령 인도 등지에서의 운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외국 지배하에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여러 민족, 여러 종속국과 종속인종의 대표자들이 1910628~30일 간 개최한 대회를 다룬 한 영문보고서에 대해 논평하는 가운데, 이 대회에서 행해진 연설들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지배하는 국가는 종속민족의 자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 체결된 조약의 이행을 감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경건한 소망을 단지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현재 형태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특히 혐오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제국주의의 일부 측면에 대해 항의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제국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투쟁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실현될 수 없으리라는 사설을 이해하고 있는 혼작조차 볼 수 없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토대에 대한 개량이 사실상 기만이며 경건한 소망에 불과하기 때문에, 또 피억압국의 부르주아 대표자들이 보다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한 억압국의 부르주아 대표자는 보다뒤로 물러나서, ‘과학적이라는 허울 아래 제국주의에 굴종하는 것이다. 그것 또한 논리적이 아닐 수 없다!

 

제국주의의 토대를 개량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 그리고 그 개량이 제국주의가 낳은 대립을 더욱 격화·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완화하는 방향으로 물러설 것인가의 문제는 제국주의 비판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이다. 금융과두제의 억압과 자유경쟁의 배제로 인하여 제국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반동과 민족적 억압의 강화를 정치적 특질로 하기 때문에 20세기 초 거의 대부분의 제국주의 나라에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쁘띠부르주아민주주의적 반대파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 경제적 토대에서 볼 때 사실상 반동적인 이들 쁘띠부르주아개량주의적 반대파에 대해 카우츠키는 굳이 반대하려 하지 않았고, 또 반대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실천적으로 이들과 융합하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카우츠키 및 카우츠키류의 광범한 국제적 조류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1898년 스페인과의 제국주의전쟁으로 인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최후의 모히칸이라 할 수 있는 ()제국주의자들의 반대파가 생겨났다. 이들은 이 전쟁을 범죄라고 선언하고 외국 영토의 병합을 위헌으로 간주했으며, 필리핀 원주민의 지도자 아귀날도의 처리문제(미국인들은 그에게 필리핀의 독립을 보장하였지만 나중에 군대를 상륙시켜 병합해 버렸다)완전한 사기극이라고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은 링컨의 말을 인용했다. “백인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것은 자치이다. 그러나 백인이 자기 자신을 통치함과 동시에 다른 인종도 통치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치가 아니라 전제 (專制)이다.” 그러나 이 비판이 제국주의와 트러스트 간의 연결, 따라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적 토대 간의 불가분한 연결을 인식하기를 꺼려하고, 또 대규모 자본주의와 그 발전이 생성시킨 세력에 참여하기를 꺼려하는 한, 그것은 경건한 소망에 그칠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 비판에 있어서 홉슨이 취한 기본적 태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홉슨은 카우츠키보다 앞서 제국주의의 불가피성이라는 주장에 반대하고, 민중의 소비능력을 높일’(자본주의하에서!)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 자주 인용했던 아가드, 란스부르그, 에슈베게, 프랑스 저술가 중에 1900년에 영국과 제국주의(England and Imperialism)라는 천박한 저서의 저자 빅토르 베라르(Victor Berard) 등은 제국주의, 은행의 전능, 금융과두제 등을 비판하는 데 있어 쁘띠부르주아적 관점에 서 있는 대표적 예이다.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처하지 않는 이 저자들은 제국주의를 자유경쟁 및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것으로 여기며, 분쟁과 전쟁으로 치닫는 바그다드철도계획을 비난하고, 평화에 대한 경건한 소망따위를 부르짖고 있다. 또한 국제 주식 및 유가증권 발행의 통계가인 네이마르크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1912년에 수천 억 프랑에 달하는 국제적유가증권을 계산하고는 이렇게 감탄했다. “도대체 평화가 파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이처럼 엄청난 양의 유가증권 앞에서 누가 감히 전쟁이라는 모험을 시작할 수 있겠는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같은 단순성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처럼 순진함을 가장하면서 제국주의 하에서의 평화에 대해서는 진지하게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이해관계에 맞아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우츠키가 1914, 1915, 1916년에 이와 동일한 부르주아개량주의적 관점에 서서, 평화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제국주의자, 사이비사회주의자, 사회평화주의자)고 주장했을 때, 도대체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국주의의 분석과 그 뿌리 깊은 모순에 대한 폭로가 아니라, 이들 모순을 옆으로 치우고 회피해 버리려는 개량주의적 경건한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제국주의에 대한 카우츠키의 경제적 비판의 견본이 있다. 그는 1872년과 1912년의 영국과 이집트 간에 이루어진 수출입량의 통계를 검토한다. 이에 따르면 양국 간의 수출입량은 영국의 대외무역량보다 느린 속도로 증가해 온 듯이 보인다. 그는 이 사실로부터, “군사적 점령 없이 단순히 경제적 요소만 작용했더라면 영국과 이집트 간의 무역량은 보다 적었을 것이라고 가정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자본의 팽창욕구는……제국주의의 폭력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화적 민주주의에 의해 가장 잘 촉진될 수 있다고 말한다.

 

러시아에서의 카우츠키 추종자인(그리고 사회배외주의자들에 대한 러시아에서의 보호자인) 스펙타토르(Spectator)씨에 의해 글자 한자 바꾸지 않고 되풀이되는 카우츠키의 그러한 주장이야말로 제국주의에 대한 카우츠키식 비판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훨씬 상세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힐퍼딩으로부터 한 가지 인용하면서 시작하기로 한다. 카우츠키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 특히 19154월에는 공공연히 힐퍼딩의 결론을 모든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고 선언한 바 있다.

 

힐퍼딩은 이렇게 쓰고 있다. “보다 진보적인 자본주의 정책을, 이제는 지나간 자유무역의 시대 및 국가를 적대시하던 시대의 정책과 대비시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이 아니다. 금융자본의 경제정책, 즉 제국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응은 자유무역이 아니라 사회주의여야 한다.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정책의 목표는 자유무역의 부활이라는 이상이것은 이제 반동적인 이상이 되어 버렸다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철폐함으로써 경쟁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금융자본의 시대에 반동적 이상’, ‘평화적 민주주의’, ‘단순한 경제적 요소만의 작용따위를 옹호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그러한 이상은 독점자본주의에서 비독점자본주의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며, 사실상 개량주의적 기만이기 때문이다.

 

군사적 점령이 없었다면, 제국주의가 없었다면, 그리고 금융자본이 없었다면 이집트와의(혹은 다른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와의) 무역은 훨씬 더 성장했을 것이다.” 이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독점 일반에 의해, 금융자본과의 연관이나 멍에(이것 역시 독점이다)에 의해, 또는 몇몇 나라들의 독점적 식민지 소유에 의해 자유경쟁이 제한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보다 급속히 발전했으리라는 의미인가?

 

카우츠키의 주장은 그 외의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의미는 무의미하다. 어떤 종류의 독점도 없었다면 자유경쟁은 자본주의와 무역을 보다 급속히 발전시켰을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무역과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하면 할수록 독점을 생성시키는 생산과 자본의 집적은 점점 거대해진다. 더욱이 독점은 이미 다름 아닌 자유경쟁으로부터 출현했다! 설사 지금 독점이 진보를 늦추기 시작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유경쟁을 긍정하는 논거가 될 수 없다. 자유경쟁은 독점을 생성시킨 이후에는 이미 불가능해진 것이다.

 

카우츠키의 주장을 아무리 헤집어 보아도 그 속에서는 반동과 부르주아개량주의 이 외의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그 주장을 수정하여, 스펙타토르가 말하는 것처럼 영국 식민지와 영국과의 무역이 오히려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에 비해 보다 느리게 발전하고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카우츠키를 구해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때 영국을 능가하고 있는 것도 역시 독점이며, 제국주의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단지 다른 나라들(미국과 독일)의 독점이며 제국주의일 뿐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카르텔은 새롭고 독특한 형태의 보호관세, 즉 수출에 적합한 상품을 보호하는 보호 관세를 만들어 냈다(엥겔스는 자본론3권에서 이 점을 주목했다). 또한 잘 알려진 것처럼 카르텔과 금융자본은 그들에게 고유한 제도인 할인가격의 상품수출또는 영국인이 말하는 덤핑이라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 즉 카르텔은, 국내에서는 상품을 높은 독점가격으로 판매하는 반면, 국외에서는 경쟁자를 떨구고 자신의 생산을 최대한 확장시키기 위해 훨씬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영국 식민지와 독일과의 무역이 영국과의 무역보다 급속히 발전된다면, 그것은 단지 독일 제국주의가 영국 제국주의보다 더 젊고 강력하며 잘 조직되어 있다는 것, 곧 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할 뿐, 결코 자유무역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식민지 종속 간의 투쟁이 아니라 두 개의 경쟁적 제국주의, 두 개의 독점, 두 개의 금융자본그룹 간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독일 제국주의의 우월성은 식민지적 경계선이나 보호관세의 장벽보다 강력하다. 이것을 자유무역과 평화적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논거로 사용하는 것은 진부한 생각이며, 제국주의의 본질적 특정과 특질을 잊어버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쁘띠부르주아개량주의로 대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카우츠키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를 쁘띠부르주아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부르주아 경제학자 란스부르그가 무역통계자료에 대해 카우츠키보다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 있는 일이다. 그는 무작위로 선택한 단 하나의 나라와 단 하나의 식민지를 그 외의 나라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제국주의 나라의 수출무역을 이 나라에 금융적으로 종속되어 있으며, 돈을 벌어가는 나라 및 금융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나라들과 비교하여 검토하고 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P. 152의 표).

 

 

독일의 수출량

 

(단위 : 백만 마르크)

 

 

 

나라명

 

1889

 

1908

 

증가율(%)

 

독일에

 

금융적으로

 

종속된

 

나라

 

루 마 니 아

 

포 르 투 갈

 

아 르 헨 티 나

 

브 라 질

 

칠 레

 

터 키

 

48.2

 

19.0

 

60.7

 

48.7

 

28.3

 

29.9

 

70.8

 

32.8

 

147.0

 

84.5

 

52.4

 

64.0

 

47

 

73

 

143

 

73

 

85

 

114

 

 

234.8

 

451.5

 

92

 

독일로부터

 

금융적으로

 

독립된

 

나라

 

영 국

 

프 랑 스

 

벨 기 에

 

스 위 스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령 동인도

 

651.8

 

210.2

 

137.2

 

177.4

 

21.2

 

8.8

 

997.4

 

437.9

 

322.8

 

401.1

 

64.5

 

40.7

 

53

 

108

 

135

 

127

 

205

 

363

 

 

1,206.6

 

2,264.4

 

87

 

 

란스부르그는 결론을 끌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참으로 기묘하게도, 만약 이 수치들이 무엇인가를 증명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독일에 금융적으로 종속된 나라들로의 수출은 금융적으로 독립된 나라들로의 수출보다도 약간이나마 보다 빨리 증대했기 때문이다(앞에서 만약이라고 강조한 이유는 란스부르그 수치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출과 차관의 연관에 대해 란스부르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890~91년간 독일은행들을 통해 루마니아에 차관이 공여되었는데, 이 은행들은 이미 몇 해 전부터 차관공여를 신청해 놓고 있었다. 차관은 주로 독일에서 철도재료를 구매하는 데 사용되었다. 1891년에 독일에서 루마니아로의 수출은 5,500만 마르크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그것은 3,940만 마르크로 감소했으며, 이후 다소 증감이 있었으나 1900년에는 2,540만 마르크로 감소했다.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야 두 가지 새로운 차관의 덕택으로 다시 1891년의 수준을 회복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에 대한 독일의 수출은 1888~89년의 차관으로 인해 2,110만 마르크(1890)로 증대했다. 그러나 그 다음 2년 동안 그것은 매년 각각 1,620만 마르크 및 740만 마르크로 감소했으며, 1903년에야 본래의 수준을 회복했다.”

 

독일과 아르헨티나 간의 무역통계는 훨씬 특징적이다. 1888년과 1890년의 차관으로 아르헨티나에 대한 독일의 수출은 6,070만 마르크(1889)에 달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불과 1,860만 마르크, 1/3 이하로 떨어졌다. 1901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회복되어 1889년 수준을 초과했지만, 그것은 발전소 건설을 위한 선도금 및 기타 신용공여와 관련된 새로운 국채와 지방채의 발행에 기인하는 것이다.”

 

칠레에 대한 수출은 1889년의 차관으로 인해 4,520만 마르크(1892)로 증대했으나, 1년 후에는 2,250만 마르크로 감소했다. 1906년에 독일은행들이 새로운 차관을 공여함으로써 수출은 8,470만 마르크(1907)로 늘었지만 1908년에는 다시 5,240만 떨어졌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란스부르그는 차관과 결부된 수출이 얼마나 불안정하며 불규칙한 것인가, 국내산업을 자연스럽고 조화롭게발전시키는 대신 자본을 국외로 수출하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일인가, 대외차관을 따내기 위해 크루프(Krupp)는 얼마나 값비싼뇌물을 지불하는가 하는 따위의 재미있는 쁘띠부르주아적 도덕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 사실들이 분명히 말해주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점이다. , 수출의 증대는 금융자본의 바로 이러한 사기술책과 관련되어 있으며, 금융자본은 부르주아 도덕률 따위에는 관심없고 단지 쇠가죽을 두 번 벗기는 데만먼저 공여되는 차관 자체로부터 이윤을 챙기고, 그 다음에는 차관의 사용자가 바로 그 차관으로 크루프로부터 구매한다든가 철강신디케이트로부터 구매할 때 또 다른 이윤을 챙긴다관심을 가진다는 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란스부르그의 통계는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의 통계가 카우츠키와 스펙타토르의 것보다 과학적이기 때문이며, 란스부르그가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출 등과 관련하여 금융자본의 의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특히 금융업자의 술수와 수출의 연관을, 특히 카르텔 상품의 판매와 수출의 연관을, 하는 식으로 추출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식민지와 비식민지, 어느 제국주의와 다른 제국주의, 어느 반식민지 또는 식민지(이집트)와 다른 모든 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흐려버리는 것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카우츠키의 이론적 비판은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한 것이며, 단지 기회주의자 및 사회배외주의자와의 평화나 통일을 선전하는 서론으로서만 이용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호 병존하는 독점과 자유경쟁 간의 모순, 금융자본의 대규모 활동’(및 대규모 이윤)과 자유시장에서의 정직한거래 간의 모순 등 제국주의의 가장 심각하고 근본적인 모순들을 회피하고 흐려버리기 때문이다.

 

카우츠키가 발명한 초제국주의라는 악명 높은 이론은 이러한 반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1915년 카우츠키의 주장과 1902년 홉슨의 주장을 비교해 보자.

 

카우츠키 : “……현재의 제국주의 정책이 새로운 초제국주의 정책으로 대체되어, 일국적 금융자본의 상호경쟁 대신 국제적으로 연합한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의 공동착취를 도업하게 될 가능성은 없는가? 어쨌든 그러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충분히 답변할 만큼의 전제는 아직 결여되어 있다.”

 

홉슨 : “각각 비문명권의 종속국들을 거느리고 있는 소수의 거대 연방제국들에게 널리 퍼진 기독교문명은 많은 사람에게 현재 여러 경향의 가장 정당한 발전인 것처럼 생각되며, 국제제국주의(inter-Imperialism)의 강고한 기초 위에서 영원한 평화에 대한 희망을 부여할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카우츠키가 초제국주의 또는 초월제국주의라고 이름붙인 것을 그보다 13년 전에 홉슨은 국제제국주의라고 명명했다. 라틴어 접두사를 바꾸어 씀으로써 새롭고 재치 있는 용어를 만들어 낸 것을 제외한다면 카우츠키가 과학적사고의 영역에서 이룩한 진보란 단지 홉슨이 사실상 영국 목사들의 위선으로 묘사했던 것을 그는 마르크스주의라고 선언하고 있는 점뿐이다. 보어전쟁 이후, 남아프리카 전쟁터에서 많은 친지들을 잃은 데다가 영국 금융업자의 보다 높은 이윤을 보장해 주기 위한 보다 높은 세금에 시달려야 했던 영국 중간계급 및 노동자들을 위무하는 데 이들 고귀한 신분(목사들역주)이 주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제국주의는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든가, 그것은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국제(혹은 초)제국주의에 접근해 가고 있다는 따위의 이론보다 더 좋은 위무가 있을 수 있을까? 영국 목사들이나 감상적인 카우츠키의 의도가 아무리 선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카우츠키 이론의 객관적인, 즉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의의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그것은 대중의 주의를 현 시대의 예민한 대립과 첨예한 문제로부터 돌려, 미래의 가상적 초제국주의에 대한 허구적 전망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하에서 항구적인 평화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으로 위무하려는 극히 반동적인 방법이다. 대중의 기만이야말로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적이론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이다.

 

사실 카우츠키가 독일 노동자(및 전세계의 노동자)에게 주입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장래의 전망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깨닫기 위해 널리 알려진 논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을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인도, 인도차이나, 중국의 예를 들어 보자. 6~7억의 인구를 가진 이들 3개의 식민지·반식민지국이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 등 몇 개 제국주의열강 금융자본의 착취를 받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 이 제국주의 나라들이 그 아시아국가들에게서 자신들의 영토와 이익, 세력권을 보호하거나 확장할 목적으로 서로 대립되는 동맹을 맺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 동맹은 국제제국주의적또는 초제국주의적동맹일 것이다. 또 모든 제국주의열강이 그 아시아 지역들을 평화적으로 분할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동맹은 국제적으로 연합한 금융자본의 동맹일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동맹은 20세기의 역사, 예를 들면 중국에 대한 열강의 태도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자본주의가 온전히 유지된다고 가정할 때, 이러한 동맹이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가능한 모든 형태의 갈등, 분쟁, 투쟁을 제거하리라는 것이 과연 상상할 수 있는일인가?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이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 이외의 어떠한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하에서 세력권, 이익, 식민지 등의 분할을 위한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분할에 참여하는 나라들의 경제력·금융력·군사력의 전반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하에서는 개별 기업, 트러스트, 산업부문 및 나라들 간의 균등한 발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분할에 참여하는 나라들의 힘은 똑같은 정도로 변화하지 않는다. 반세기 전 독일 자본주의의 힘은 당시 영국의 힘과 비교하면 지극히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일본 역시 러시아와 비교할 때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0~20년 동안 제국주의열강 간의 상대적 힘이 변화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대체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영국 목사들이나 독일 마르크스주의자’, 카우츠키, ‘국제제국주의적또는 초제국주의적동맹 등의 진부하고 속물스러운 공상에서가 아닌 자본주의체제의 현실에서 볼 때, 그 형태가 어떠하든, 즉 다른 것들에 대립되는 하나의 제국주의적 연합이든 아니면 모든 제국주의열강을 포괄하는 전반적 동맹이든 그것들은 모두 전쟁과 전쟁 사이의 하나의 휴전이상의 것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평화적 동맹은 전쟁의 근거를 마련하기도 하지만 전쟁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한다. 양자는 서로 제약하는 가운데 세계경제와 세계정치의 제국주의적 관계와 연관이라는 동일한 토대로부 터 평화적 투쟁과 비평화적 투쟁의 형태를 교대로 만들어 낸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달래고 이들을 부르주아지 측으로 넘어간 사회배외주의자와 화해시키기 위해서, 지나치게 현명한 카우츠키는 단일한 사슬의 한 고리를 다른 고리로부터 분리시키고, 중국의 평화를 위한 모든 열강의 오늘의 평화적인(그리고 초제국주의적인, 아니 초초제국주의적인) 동맹(의화단사건의 진압을 상기해 보라)을 내일의 비평화적 분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모레에는 예컨대 터키의 분할을 위한 또 다른 평화적인전반적 동맹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제국주의적 평화기와 제국주의적 전쟁기간의 살아 있는 연관을 보여주는 대신, 카우츠키는 노동자들에게, 이들의 죽어버린 지도부와 화해시키기 위해 죽어버린 추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 저술가 힐은 자신의 저서 유럽의 국제적 발전에서의 외교사서문에서 최근의 외교사를 다음과 같이 시대구분하고 있다. 혁명의 시대, 입헌운동의 시대, 오늘날의 상업제국주의시대 또 다른 저술가는 1870년 이후 영국의 세계정책사를 4개의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1차 아시아시대(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진출하려는 러시아를 막기 위한 투쟁). 아프리카시대(대략 1885~1902년경) : 아프리카 분할을 위한 프랑스와의 투쟁의 시대(프랑스와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1898년의 파쇼다사건’). 2차 아시아시대(러시아에 대항하는 일본과의 동맹). 유럽시대 : 주로 독일에 대항하여. 은행가인 리써는 1905, “정치적 탐색전이 금융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쓰면서,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금융자본이 어떻게 양국의 정치적 동맹을 준비하고 있는가, 그리고 페르시아를 둘러싼 독일과 영국의 분쟁, 중국에 대한 차관을 둘러싼 모든 유럽자본가들의 분쟁 등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보라, 제국주의의 일상적인 분쟁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는 평화적인 초제국주의동맹의 생생한 현실을!

 

카우츠키가 제국주의의 뿌리 깊은 모순을 흐려버린 것은 불가피하게 제국주의에 대한 미화로 귀결되며, 이는 또한 제국주의의 정치적 특질에 대한 저자의 비판에도 그 혼적을 남가지 않을 수 없다. 제국주의는 금융자본과 독점의 시대로서, 어디에서나 자유가 아닌 지배에 대한 열망을 가져온다. 정치체제가 어떠하든 간에 이들 경향의 결과는 어디에서나 반동이며, 정치영역에서의 대립을 극도로 심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민족적 억압과 병합의 열망, 즉 민족자주의 침해는 더욱 심화된다(병합은 바로 민족자결권의 침해에 다름 아닌 것이다).

 

힐퍼딩은 제국주의와 민족적 억압의 연관성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이 개방된 나라로 수입된 자본 대립을 심화시키고, 민족적 자각에 눈을 떠가는 민중들의 침입자에 대한 저항을 끊임없이 증대시킨다. 그리고 이 저항은 쉽사리 외국자본에 대한 위험스런 저항수단을 사용하는 데까지 발전한다. 낡은 사회관계는 혁명적으로 변혁되고, ‘역사 없는 민족의 오래고 오랜 농업적 고립성은 파괴되며, 이들은 자본주의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간다. 자본주의 자체가 서서히 피정복민족에게 자신들의 해방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제공해 주며, 이들 민족은 이전에는 유럽민족들에게 최고의 이상이었던 목표, 즉 경제적·문화적 자유의 수단으로서 통일된 민족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민족자주를 위한 이러한 운동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망한 착취영역에서 유렵자본을 위협하며, 이에 따라 유럽자본은 오직 끊임없이 군사력을 증강함으로써만 자신의 지배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은, 새로이 개방된 나라들뿐만 아니라 이전의 나라들에서도 제국주의는 병합을 추구하고 민족적 억압을 강화하며, 따라서 저항을 격화시킨다는 점이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에 의한 정치적 반동의 심화에 반대하면서도, 제국주의의 시대에 기회주의와의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특히 긴급한 문제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있다. 그는 병합에 반대하면서도, 그 반대 기회주의자들에 대해 가장 덜 공격적으로, 이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는 바로 독일의 청중을 향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요한 문제, 예컨대 독일에 의한 알사스 로렌의 병합 등의 사실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카우츠키의 이러한 정신이상을 감정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한 일본인이 미국의 필리핀 병합을 비난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문제는 이렇다. 그 일본인의 비난에 대해서, 사람들은 과연 그가 필리핀 병합의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병합 그 자체를 진정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는 오직 그 일본인이 일본의 조선 병합에 반대하여 싸우고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분리될 자유를 요구하는 경우에만 그가 진정 성실하게, 또 정치적으로 정직하게 병합에 반대하여 투쟁한다고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제국주의에 대한 카우츠키의 경제적·정치적 비판뿐만 아니라 그의 이론적 분석에도 역시 제국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모호하게 하고 얼버무리려는, 마르크스주의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정신이, 또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유럽 노동계급운동 내의 기회주의와의 허물어져 가는 통일을 보존하려는 열망이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10장 제국주의의 역사적 위치

 

 

지금까지 보았던 것처럼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은 독점자본주의이다. 제국주의의 역사적 위는 바로 그러한 본질에 의해서 규정된다. 왜냐하면 자유경쟁의 토양에서, 즉 바로 자유경쟁 자체에서 성장해 나온 독점은 곧 자본주의체제로부터 보다 높은 사회경제적 질서로의 과도형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히, 지금 고찰하고 있는 시대를 특징짓는 독점의 네 가지 주요 유형 혹은 독점자본주의의 네 가지 주요 양태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첫째, 독점은 독점자본가단체인 카르텔, 신디케이트 및 트러스트와 관련된다. 이들 단체가 오늘날이 경제생활에서 어느 정도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는가는 앞에서 이미 본 바 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이들 독점체는 선진국에서 완전히 패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카르텔 형성의 첫걸음은 고율의 보호관세를 가진 나라들(독일, 미국)이 먼저 내딛었지만, 자유무역체제를 취하는 영국 역시 그에 약간 뒤떨어졌을 뿐 생산의 집적으로부터 독점체의 출현이라는 동일한 기본적 현상을 보여주었다.

 

둘째, 독점체들은 가장 중요한 원료자원,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적이면서 가장 고도로 카르텔화한 산업들인 석탄업과 제철업의 원료자원에 대한 장악을 촉진시켰다. 가장 중요한 원료자원의 독점은 대자본의 권력을 엄청나게 증대시켰으며, 카르텔화된 산업과 카르텔화 되지 않은 산업 간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셋째, 독점은 은행으로부터 생겨났다. 은행은 소극적인 중개기업에서 금융자본의 독점체로 발전했다.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3~5개 정도의 거대은행은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인적 결합을 이룩하였으며, 전국의 자본과 화폐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천억의 돈에 대한 지배권을 자신들의 수중에 집적시켰다. 현대 부르주아사회의 모든 경제적·정치적 기구들에 예외 없이 종속관계의 조밀한 그물을 쳐놓은 금융과두제, 이것이야말로 독점의 가장 두드러진 양태이다.

 

넷째, 독점은 식민지정책으로부터 성장했다. 금융자본은 식민지 정책의 수많은 기준의 동기에 덧붙여 원료자원, 자본수출, 세력권, 유리한 거래, 이권, 독점이윤 등을 위한, 나아가 경제영역 전반을 위한 투쟁을 만들어 냈다. (1876년의 경우처럼)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대륙의 1/10만을 식민지로 점유하고 있던 때의 식민지정책은 먼저 움켜쥔 자가 차지한다.”는 식의 비독점적인 방법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00년까지) 아프리카의 9/10가 장악되고, 전 세계가 분할되었을 때에는 불가피하게 식민지에 대한 독점적 소유의 시대, 따라서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을 위한 특히 첨예화된 투쟁의 시대가 도래 했다.

 

독점적 자본이 자본주의의 제반 모순을 얼마나 심화시켜 왔는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단지 높은 생활비용과 카르텔의 횡포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모순의 심화는 세계 금융자본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후부터 시작된 역사적 이행기의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독점, 과두제, 자유가 아닌 지배를 위한 열망, 한 줌밖에 안 되는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민족에 의한 점증하는 약소민족의 착취, 이 모든 것들이 제국주의를 기생적 자본주의 혹은 부패해 가는 자본주의로 규정하도록 만드는 제국주의의 현저한 특징을 낳았다. 이렇게 해서 제국주의의 여러 가지 경향 가운데 하나로서 금리생활국가’, 고리대국가의 형성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으며, 이들 국가의 부르주아지는 점점 더 자본수출과 이자표에 의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패화경향이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을 저해하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류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제국주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몇몇 산업부문, 몇몇 부르주아계층, 그리고 몇몇 나라들은 각기 어느 정도씩 그러한 경향들로부터 일부 벗어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자본주의는 어느 때보다도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성장은 일반적으로 갈수록 불균등해지고 있으며, 이는 특히 가장 풍부한 자본을 가진 나라들(예를 들면 영국)의 부패 속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독일의 대은행에 관한 연구서의 저자 리씨는 독일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다지 느린 것만도 아니었던 이전 시기(1848~70)의 진보속도와 현 시기(1870~1905) 독일의 국민경제 전체 및 독일 은행의 진보속도의 관계는 마치 좋았던 옛날 우편마차의 속도와 오늘날 자동차 속되의 관계와 비슷하다.……그것은 지나치게 빨라서, 무고한 행인은 물론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한 금융자본은 빨리 성장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기존의 부유한 나라들로부터반드시 평화적이지만은 않은 방법으로식민지를 빼앗는 데 있어서 비교적 조용한방식만 사용하는데 만족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최근 수십 년간의 경제발전은 독일보다도 훨씬 빨랐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현대 미국 자본주의의 기생적 특징은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공화국인 미국이 부르주아지와 군주국인 일본이나 독일의 부르주아지를 비교해 보면, 가장 현저했던 정치적 차이조차 제국주의 시대에는 극도로 감소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정치적 차이가 일반적으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경우에 있어 우리는 기생성이라는 명확한 특징을 가진 하나의 부르주아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산업분야 중에서 어느 한 분야, 또는 수많은 나라 중에서 어느 한 나라의 자본가들이 높은 독점이윤을 수취함으로써, 이들은 경제적으로 노동자의 특정한 부분, 때로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노동자들까지 매수할 수 있으며, 이들 노동자를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대립시켜 특정 산업분야 또는 특정 나라 부르주아지의 편으로 회유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세계의 분할을 위한 제국주의 나라들 간의 대립의 격화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이렇게 해서 제국주의와 기회주의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이 결합은 영국에서 가장 머저, 또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다른 나라들 보다 영국에서 한층 빨리 제국주의적 발전의 특정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르토프 같은 사람은 제국주의가 노동계급운동 내의 기회주의와 결합하고 있다는 사실이는 오늘날 특히 분명하게 눈에 띄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을 부인하고, 다음과 같은 (카우츠키와 휴이즈만스[Huysmans]류의) ‘공식적 낙관주의를 주장한다. , 만약 기회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이 바로 진보적 자본주의라면, 혹은 기회주의로 기우는 것이 바로 가장 임금수준이 높은 노동자들이라면,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자들의 대의는 이미 무의미해져 버렸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낙관주의에 어떤 환상도 품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기회주의와 관련된 낙관주의이며, 기회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낙관주의이다. 사실상 기회주의의 발전이 유달리 빨랐으며 유달리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기회주의의 지속척인 승리를 전혀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건강한 신체에 악성종양이 급속히 커지면 오히려 빨리 옮아 터져서 몸을 회복시켜 줄 뿐이다. 여기서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지 않을 경우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사기와 협잡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자들이다.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에 대해 지금껏 이 책에서 서술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제국주의를 이행기의 자본주의,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매우 교훈적인 것은 현대 자본주의를 서술하는 가운데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상호연결interlocking’이라든가 고립의 배제등과 같은 구호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은행은 그 가능이나 발전과정을 보더라도 순수하게 사경영적인 기업은 아니며, 갈수록 사경영적인 규제영역을 뛰어넘어 성장하고 있다는 식이다. 더욱이 바로 지금 인용한 글의 필자인 리써는 자못 심각한 투로 사회화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예언실현되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호연결이라는 구호는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단지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칭을 표현할 뿐이다. 그것은 그 관찰자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피상적이고 우연적이며 혼란스러운 것을 노예적으로 모방하고 있다. 그것은 관찰자가 소재의 막대한 양에 압도되어 그 의미나 중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주식 소유 및 사적 소유자들 간의 관계는 우연적으로 상호연결 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연결의 토대에는 바로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생산관계가 있는 것이다. 대기업이 더욱 거대해지고, 대량의 자료에 대한 정확한 계산에 기초하여, 수천만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주된 원료 공급의 2/3, 3/4, 아니 전부를 계획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 되면, 또 그 원료를 체계적·조직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수천 수백 마일까지 떨어진 생산의 적재적소로 운송할 수 있게 되면, 그리하여 수많은 종류의 완제품 제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모든 원료처리작업 단계를 하나의 중심에서 감독할 수 있게 되면, 그리고 이 생산물들을 하나의 계획에 따라 수억의 소비자들에게 분배할 수 있게 되면(예컨대 미국의 석유트러스트가 미국과 독일에 석유를 공급·판매하는 것처럼), 그때 우리는 단순한 상호연결이 아니라 바로 생산의 사회화를 이룩한 것이다. 또한 그때 사적 경제와 사적 소유관계는 더 이상 그 내용물에 적합하지 못한 껍질, 따라서 인위적으로 그 제거를 늦춘다면 불가피하게 부패해 버릴 수밖에 없는 껍질, (혹시 최악의 경우 기회주의적 종양의 치료가 지연된다면) 상당히 오랫동안 부패상태로 남아 있을 수도 있겠으나 결국은 제거되고 말 껍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독일 제국주의의 광적인 찬미자인 슐츠-게페르니츠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다.

 

일단 독일은행에 대한 최고 관리권이 10여 명의 사람들 손에 맡겨졌다면, 이들의 행위는 오늘날 국민복지에 있어서 대다수 국가재상의 행위보다 중요하다……[여기에서 은행가, 재상, 산업가, 금리생활자의 상호연결은 마음대로 무시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경향들의 발전을 그 논리적 결론에까지 밀고 나간다면 다음과 같다. 전국의 화폐자본은 은행으로 통합된다. 은행은 스스로 카르텔로 결합된다. 전국의 자본투자는 유가증권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생시몽의 천재적인 예언이 실현되는 것이다. ‘경제관계가 통일적 규제 없이 전개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오늘날 생산의 무정부상태는 생산의 조직화에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서로 독립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경제적 욕망을 알지 못하는 고립된 생산자가 생산을 감독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특정한 공공기관이 생산을 감독하게 될 것이다. 보다 높은 관점에서 사회경제의 광범한 영역을 조망할 수 있는 중앙관리위원회가 사회경제를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도록 통제할 것이며, 생산수단을 적절히 배분할 것이고, 특히 생산과 소비 간에 항상적인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배려할 것이다. 이미 경제적 노동의 조직화를 그 가능의 일부로서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는 기관이 있다. 그것은 곧 은행이다.’ 생시몽의 예언이 실현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것으로 향하는 도상에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다만 형태만 다를 뿐인 마르크스주의이다.”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에 대한 참으로 통렬한 반박이며, 마르크스의 정확한 과학적 분석으로부터 생시몽의 추측으로의 일보후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의 추측일지라도 추측은 단지 추측에 불과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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